1967년 5월 국가안전기구 의장직으로 유리 블라지미로비치 안드로포프가부임하면서 나는 내 인생의 중요한 단계로 접어들었다. 안드로포프의 부임후방첩국에 대한 압력은 훨씬 더 강화되었고 반니꼬프 방첩국장의 해임에 이어다른 요원들도 해직된다는 소문이 들렸다. 내게도 먹구름이 덮쳐올 것으로느껴졌다. 내가 이전 KGB 의장의 사람이라며 조치를 취할 것을 누군가 안드로포프에게 요구했던 것이다. 나는 어느순간 면직될수 있다는 것을 예감하고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러던 어느날 전화벨이 울리더니 의장이 나를 불렀다. 시계를 보니 밤10시 정각이었다. 안드로포프는 나를 편하게 맞아주었다. 그는 내게 앉기를 권하더니 국가안전기구의 발전 전망과 국내 상황을 전반적으로 어떻게 평가하는지 나의 견해를 물었다. 나는 서방의 점증하는 압력에 따른 불안을 피력했다. 그는 갑자기 새로 창설되는 이데올로기 투쟁담당국 제1부국장 자리를 내게 제의했다.
그는 말했다. "신설국의 중요 임무는 상황을 정확하게 분석할수 있는 정치적 예측이라고 보오. 신설국은 외국으로부터 들어오는 이데올로기의 팽창을저지해야 하고 그 팽창에 저항하는 확실한 방패가 돼야 하오. 바로 여기에첩보원들의 업무 역할이 중요한 것이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신설국의 임무에 대한 안드로포프의 견해를 대략적으로 언급했지만 그순간 내가 느낀 것은 그가 KGB 기구 체제를 대폭적으로 개편할 의도가 있다는 점이었다. 나는 그가 계획한 근본 사상을 이해하고나서 그의 제의에 동의했다. 그는 '제5국'이라고 명명될 신설국에 대한 규정을 준비토록 내게 지시했다.
신설국의 국장은 스따브로뽈지구당위원회 선전 담당 서기였던 V·F·까드이쉐프가 맡았다. 나는 커다란 희망을 안고 일에 착수했다. 업무의 주요 원칙과 안드로포프의 당면 입장을 더 잘 알기 위해 나는 약간의 일탈을 해야했다. 당시에는 사회주의 발달 노선을 선택한 것이 실수였고 레닌 사상이 애초부터 결함이 있었다는 생각이 만연해있었다. 레닌적 노선에서 벗어났던 것이다. 스탈린에서부터 고르바초프에 이르기까지 당 지도자들은 레닌의 이름에숨어서 레닌 사상에 충실할 것을 맹세했지만 모두 급격히 레닌의 노선에서이탈했다.
부정부패의 문제만 해도 그렇다. 1921년 레닌에 의해 쓰여진 제9차 당대회결의문에는 '책임있는 공산당원들은 개인적인 급여를 받을수 없으며 초과수당이나 상여금도 똑같이배분해야 한다'고 규정돼있다. 이런 레닌의 유언을레닌 교시의 교활한 '추종자'들이 어떻게 과감히 말살할수 있단 말인가.'봉투'라는 좋지못한 관행은 스탈린에 의해 시작됐다. 이는 지도층 노동자들을 위한 최초의 특권이었다. 그후 흐루시초프가 여러 기업과 지방을 방문할때 세련된 접대, 호화스런 선물과 사우나시설 등을 갖춘 '손님용 별장'이건축되기 시작했다. 이같은 위선은 페레스트로이카가 시작될때까지 지속됐다. 고르바초프시대에는 이미 별장이 아니라 완전한 궁전이 솟아올라있었던것이다.
부패, 위선, 노골적인 아첨은 권력 상층부내에서 발생해 마치 불처럼 전계층으로 번져갔다. 누가 더 고위층을 만족시킬수 있는가 라는 진짜 경쟁이 시작됐다. 그루지야 공산당 지도부는 브레즈네프에게 금으로 된 싸모바르 기념품을 선사했고 이번에는 다른 공화국의 지도부가 더 비싼 선물들을 갖다 바치기도 했다. 관리들의 지위가 낮아질수록 선물은 좀더 검소한 것으로 오고갔다.
나라의 거의 모든 지도자들이 이 원칙을 고수했지만 꼬스이긴과 안드로포프만이 예외로 간주할수 있다. 내가 보기에 이 두사람은 레닌적 노선으로 나라를 돌려놓으려고 시도한 몇 안되는 사람중의 일부이다.
부패 세균의 권력층 침투로 당은 민중들로부터 권위를 잃어가고 있었고 당연히 이 문제는 KGB와 우리 5국에서도 여러번 논의됐다. 부패는 심각한 정치적 문제가 됐다. 부패와의 전쟁을 KGB로 위임할 것을 요구하는 소리가 더욱더 울려나왔다. 그러나 국가안전기구가 모든 능력을 다 동원했음에도 불구하고 두드러진 성과를 얻을수 없었다는 것을 인정할수밖에 없다.우리는 안드로포프와 상의한후 곧 이 문제에 관한 구체적 해결책을 제시한문건을 작성했다. 우리는 중앙위원회가 공개서한을 통해 모든 공산주의자들에게 알리도록 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했다. 그 서한에는 공금횡령, 뇌물수수와의 투쟁을 위해광범위한 대중을 끌어들일수 있는 조건들이 언급돼있었다. 또한 소득에 대한 통제체제를 검토하는 것도 제안돼 있었다.그러나 중앙위원회 부서에서 그 서류는 거의 1년동안 묵혔고 결과적으로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죽은 서류가 돼버렸다. 어떠한 좋은 시도도 공산당 중앙위원회 기구의 핵심부에 들어가자마자 매번 그런 일이 발생하니, 가장 좋은 결정을 망치고 가장 훌륭한 계획을 무모하게 만들어버리는 것이 바로 중앙위원회였다.
열성적인 심복들은 폭로로 인해 최고위층이 다치지 않을까 우려했다. 고위층 인사들의 뇌물에 대한 이야기는 곳곳에서 떠돌아다녔다. 브레즈네프의 딸갈리나 레오니도브나의 엽색 행각과 보석 탐욕은 유명했다. 나를 놀라게 만든 것은 현체제로의 전화과정에서 관료들 대부분이 암거래를 통한 방법으로돈을 벌었다는 것이다.
안드로포프는 모든 행동을 통해 뇌물수수를 근절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의장과 더 친해질 것으로 기대했던 부의장 S·K·쯔비군은 의장집으로꼬냑 한상자를 보냈다. 쯔비군은 국가안전기구에 오기전까지 아제르바이잔의KGB의장으로 재임해있으면서 자신에게는 별 의미가 없는 고급 꼬냑을 선물받았던 것이다. 심부름꾼이 안드로포프의 부인 따지야나 필립뽀브나를 만났을때 그녀는 "세본 꾸지미치에게 갖다주세요. 유리 블라지미로비치는 이 꼬냑을 마실 기회가 없을 거예요. 그러니 상자를 도로 가져가세요"라고 말했다.이 사실이 널리 알려지자 아첨꾼들이 안드로포프에게 선물을 보내는 일은더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KGB 중앙사무실에는 선물을 놓아두는 2개의 방이있었는데 의장은 기념일이나 외국 인사들의 의례적인 방문으로 받은 선물을그곳에 보관했다. 모든 선물들은 KGB 벽에 비치됐고 어떤 것들은 안드로포프의 지시에 따라 고아원이나 다른 자선 목적으로 보내졌다. 어떤 경우에도 안드로포프는 선물중 어느 하나도 개인 목적으로 이용하지 않았던 것이다.안드로포프는 우리에게 인민과 유리돼서는 안되고 오히려 사회성에 근거해일을 수행해야 한다고 항상 요구했다. 그는 자신과 다른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과 아주 밀접하게 지냈고 자신의 정적이나 관점이 다른 사람들과 만나는것을 피하지 않았다. 그가 KGB의장으로 지내는 동안 단 하루도 휴가를 가본적이 없다고 나는 확실히 말할수 있다. 그는 일요일에도 사무실로 나와 자신의 건강은 돌보지도 않고 항상 업무에 매달렸다.
그는 KGB 요원들 사이에서만 권위를 얻은 것은 아니다. 그가 중앙위원회서기장으로 선출됐을 때,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그는 그다지 인기없는 기관인KGB 의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 대부분은 이 사실을 환영했다. 사람들은 그같은 인물이 꼭 필요했음을 느끼고 있었고 그에 대한 우호적인 태도는오늘날에도 인민들속에 사라지지 않고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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