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조선 후기 科擧 서울 閥族독점

"삼척산업대 차장섭 교수 학위논문"조선 후기 科擧는 서울에 기반을 둔 특정 소수 가문에 의해 독점되는 현상이 심화되었으며, 이는 인조 반정 이후 나타나기 시작한 ☞閥閱¶ 때문이라는 주장이 나왔다.삼척산업대 車長燮교수(조선사)는 박사학위 논문(경북대) "조선후기 벌열의 정치적 기반과 정국 동향"에서 조선 후기에 宗法 질서가 확립되고 족보 편찬이 본격화되었으며 가문의 계승의식이 강화되어 벌열(벌족)이 성립됐다고 밝혔다.벌열은 양반에서 분화된 최상위 계층으로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하면서 정치적 사회적 특권을 자손에게 세습한 가문으로 조선후기의 집권세력이었다. 벌열은 문과급제를 거쳐 堂上官등을 독점하면서 정치적 정치적 기반을 확고히했다.조선후기 문과 급제자 가운데 姓貫이 확인되는 1만1천58명 가운데 1명이상 급제자를 배출한 성관은 7백5개이다. 이중 급제자를 1명에서 5명까지 배출한 성관은 4백90개(69.5%)이지만 급제자 총수는 8백65명(7.8%)에 불과하다. 반면 급제자를 1백1명 이상 배출한 성관은 26개

(3.7%)이고, 급제자 총수는 5천1백23명(46.4%)에 달해 조선후기 과거가 특정 소수가문에 의해 독점되었음을 반증한다.조선후기 들어 벌열들이 문과를 독점할 수 있었던 것은 주로 벌열들이 응시하던 부정기 시험(중광시 별시 알성시 등)이 조선전기보다 두배 이상 늘어났고, 시험과목도 지방유생보다 서울 벌열들에게 유리했다는 車교수는 벌열로 분류된 40개 姓貫과 조선후기 문과급제자를 다수 배출한 주요 성관 40개를 비교하면 거의 일치한다고 밝힌다.

인조 반정으로 재집권한 서인은 관직을 독점하기 위해 반정 이후 변괴가 자주 생겨서 불안하다는 이유로 가문의 정치적 사회적 지위(벌열)을 기준으로 관인을 선발하였다↖는 그는 성관별 급제자가 전주이씨(7백90명) 파평윤씨(2백86명) 남양홍씨(2백78명) 안동권씨(2백64명) 청주한씨(2백40명) 연안이씨(2백17명) 밀양박씨(2백11명) 광주 김씨(1백88명) 여흥민씨(1백83명) 순을 보인다고 말했다.조선후기 당상관 2천7백58명 가운데 1천9백36명(70.2%)이 벌열 출신이라는 車교수는 국왕들이 과거제의 개혁, 관리임용방법의 개선, 새로운 인재의 등용등으로 견제책을 썼으나 결국 순조대 이후 벌열이 정국을 독점하고 말았다고 밝혔다.〈崔美和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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