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년 바르셀로나에 이어 이번 애틀랜타올림픽을 거치면서 이제 정봉수 라는 이름은 한국마라톤과는 떼놓을 수 없게됐다. 바르셀로나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딴 황영조와 애틀랜타 마라톤에서 이봉주의 값진 은메달뒤에 정봉수라는 감독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외에도 한국마라톤에는 정봉수사단 으로 불리는 선수들이 즐비하다.
김완기 이창우 김민우 김용복등 2000년 시드니올림픽을 겨냥한 재목들이 바로 그들이다.정감독이 마라톤에 관심을 쏟기전까지 한국마라톤은 세계무대와는 엄청난 격차를 보였다. 세계기록이 2시간 10분대에 도달해 있을때 한국선수들은 15분벽도 깨지 못했다. 그러나 정감독이 마라톤에 뛰어든지 10여년만에 한국은 세계정상에 우뚝 서게됐다. 손기정옹이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세계를 제패한지 무려 56년만이었다. 황영조의 92년 벳푸마라톤우승 및 한국신기록 수립(2시간8분47초), 92년바르셀로나올림픽제패, 94년 아시안게임 우승, 이봉주의 93호놀룰루마라톤우승,96애틀랜타올림픽 은메달등은 그가 일궈낸 값진 결실들이다.
애틀랜타에서 귀국해 채 여독이 풀리기도 전에 서울 강남구 대치동의 코오롱마라톤팀의 합숙소에서 만난 정감독은 경상도사나이답게 무뚝뚝하고 말수가 적었다. 합숙소에는 정감독과 이봉주만이남아 여독을 풀고 있었다.
그는 내 할일을 다한 거고 내가 목표한 마라톤이 성공했으므로 큰 욕심은 없습니다 라고 담담하게 얘기를 이어갔다.
정감독은 애틀랜타로 떠나기에 앞서 올림픽 2연패와 세계신기록 경신이 목표라며 옹골찬 계획을밝힌 바 있다. 물론 그것은 황영조를 염두에 두고 한 언급이었지만 우여곡절끝에 황은 지난 4월은퇴를 했고 이봉주가 은메달을 따내긴 했지만 기대했던 목표와는 조금 빗나갔다.정봉수감독, 마라톤과 그의 인연은 지도자로서 변신한 후에 맺어졌다. 선수시절 그의 주종목은 단거리였다. 우선 그가 육상과 질긴 인연을 맺게된 얘기부터들어보자. 경북 김천시 증산면 유석리가고향인 그는 달리기에 남다른 소질을 보였지만 육상을 하겠다는 생각을 가지지는 않았다. 그저산과 들을 뛰어다니는것이 좋았다. 그의 재능을 발견한 것은 초등학교시절 담임이던 김영훈 선생님이다. 그때는 공부보다도 그냥 달리는 것이 좋았죠. 그런데 초등학교 4학년때부터 6학년때까지3년간 담임을 맡으셨던 김선생님이 나에게 주법과 손놀림등 육상의 기초를 처음으로 알게 해주셨습니다
그때부터(증산초등학교) 도내국민학교대항 육상대회에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그는 육상을 하기위해 김천시내로 나와 시온중.고등학교를 다녔다. 국가대표로 뽑혀 아시안게임에 출전하는 것이소원이었던 그는 군에 입대해 육군대표로 선수생활을 계속했지만 3군체육대회에서 1백m, 4백m계주등에서 몇차례 우승한 것외에는 별다른 상복이 없었다. 그때(60년대초)는 국제대회에 참가할기회도 없었고 있다면 아시안게임밖에 없었습니다. 그래도 육, 해, 공군체육대회에서 우승을 한것이 내게는 큰 기쁨이었죠
국가대표의 꿈을 이루지못한 그는 육군코치를 맡으면서 지도자의 길로 나서게 된다.그는 마라톤에 눈을 뜨고 관심을 쏟게 된 것이 감독으로 승격한 72년부터라고 회상했다. 육군팀을 이끌고 일본으로 전지훈련을 다녀온것은 더욱 큰 자극제가 된 셈이다.
일본에 자주 전지훈련을 다니면서 큰 대회를 자주 보게 되었다. 그리고 일본측 지도자들과도 관계를 맺으면서 일본마라톤선수들의 비디오테이프등을 계속 수집해왔다. 그때 친분이 있던 일본감독들로부터 한국선수들은 마라톤이 힘들다 는 말을 자주 들었다. 그래서 우리와 체구가 비슷한일본선수가 하는데 우리가 못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 한국마라톤을 한번 살려보자 는 마음으로 후배선수들을 지도하기시작했다
당시 일본은 2시간10분대의 기록으로 세계정상권수준이었지만 우리는 2시간20분벽을 깨지못한 마라톤의 암흑기였다.
그때부터 정감독은 마라톤에 모든 것을 바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봉수 마라톤 은 하루아침에이루어지지 않았다. 81년 일본 요미우리마라톤에 우리 선수 4명이 뛰었는데 그들이 모두 32km지점에서 기권을 해 충격을 받았어요. 허기가 져서 더이상 뛰지를 못했지… 무언가 문제가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 연구를 하기 시작했다. 대회후 한국선수단 환송식때 우리 선수들이 밥과 고기를 포식하는 것을 본 일본의 사다나카 감독이 한국선수들이 저렇게 많이 먹고 어떻게 마라톤을하느냐 고 지적했다.
그래서 고무주머니 2개를 준비해 실험을 했다. 하나는 쌀한되분량의 밥을 넣고 또 한쪽에는 한홉분량의 밥을 넣고 2시간동안 마구 흔들어 보았다. 그 결과 큰주머니는 푹꺼져 빈공간이 많았고작은 주머니는 처음과 별차이가 없었다. 사람의 위장을 고무주머니라고 생각하니 결론이 나왔다.그때부터 선수들에게 소식(小食)을 원칙으로한 철저한 영양관리를 하기 시작했다철저한 과학적 분석에 의한 정봉수식 식이요법 이 여기서 선을 뵌다. 그러나 처음에는 적응하기가 쉽지않았다. 당시 3사관학교대표선수들을 상대로 식이요법을 적용해보려고 했는데 쉽지가 않더군요. 원래 많이 먹던 선수들에게 조금씩 주니까 견디지를 못해요. 그런데도 경북대표로 동아마라톤에 출전시킨 선수들이 1.2.3등을 쓸어버렸지요. 김종윤이 16분대로 뛰어 대통령께서 상금도내려보내고 군에서도 마라톤을 한 번 해보라는 격려가 잇따랐습니다
정봉수의 식이요법이 결실을 본 것은 황영조였다. 89년에 이어 90.91년 식이요법으로 차츰 나아진것을 보완해 오다가 완벽해진 것이 92년 바르셀로나였다. 평소 10분대를 뛰다가 식이요법을 적용하면 1분이 단축되었다. 엄청난 기록단축이 아닐 수 없었다.
정감독의 훈련방식에 대해 지옥훈련 등 선수들이 견디기 어렵다는 말들이 적지않았다. 황영조조차 달리는 버스에 뛰어들고싶었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고 털어놓기도 했다. 그러나 정감독은 단호했다. 마라톤은 쉽게 운동하고 적당히 해서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는 운동이 아니다. 선수들이 처음에는 힘들어 하지만 세월이 지나고 나면 본인들이 스스로 느껴 열심히 한다. 지옥훈련이라고 하는 것은 일본이 고작 주당 2백30~40㎞정도를 뛰는데 반해 우리는 일주일에 3백㎞이상을연습하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시합을 한달정도 앞두고는 3백50㎞까지뛰었다. 하루에 50㎞이상뛰지않으면 안된다. 그정도 훈련량을 소화해내지 않으면 좋은 성적을 낼수가 없다. 3백㎞이상 뛰면 대부분 한두군데씩 탈이 나게 되는데 그걸 극복해야 성공한다는 것이 그의 소신이다. 10명가운데 1명만 성공하면 된다 는게 그의 지론. 지옥훈련을 제일 먼저 소화해 낸 것이 김완기이고그다음 황영조와 이봉주도 통과했다.
선수들도 그만한 훈련량을 소화해내고 국가대표가 된후엔 불만이 싹 없어졌다.육군과 3사관학교에서 한국마라톤육성에 힘을 쏟았지만 그의 마라톤이 본격적으로 결실을 보게된것은 실업팀을 창단하면서다. 김집 당시 체육청소년장관등이 침체에 빠져있던 한국마라톤을 부흥시키자면서 코오롱에 마라톤팀 창단을 제의했고 그 과정에서 나를 코오롱 이동찬회장에게 추천을 했었죠 지난 86년 아시안게임전에 그런 논의가 나온 끝에 1년만인 87년 5월1일 코오롱팀이창단을 하고 감독을 맡게 됐다. 그런데 아시안게임 5천m에서 금메달을 따고 1만m에서 2위를 한김종윤선수등이 창단멤버였는데 1,2기는 별다른 성적을 내지못했다. 그다음에 김완기 황영조 이창우 이봉주등이 들어왔는데 한국마라톤은 사실상 이때부터 시작된 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정봉수마라톤이 본격적으로 조명을 받게된 것은 황영조가 지난 91년 벳푸마라톤에서 우승을 한데 이어 92년 바르셀로나에서 몬주익의 신화 를 이룩하고나면서 부터다. 그는 선수관리의 어려움을 털어놓는다. 그의 말투에는 애틀랜타에 황영조를 끝까지 데리고 가지못한 아쉬움이 아직까지 짙게 묻어나왔다.
마라톤은 선수관리가 제일 큰 문제지요. 거기에 철저한 영양관리, 철저한 훈련관리의 3박자가 딱들어맞아야 합니다. 일본에서는 마라톤은 배고픈 선수만이 할수있다. 배부른 선수는 기록에 도전하지 못한다 는 말이 있어요. 가난했던 선수가 성공하는 경우는 있어도 배부른 선수가 성공하는경우는 없습니다. 선수가 스타가 되고 돈이 생기면 친구도 생겨요. 그걸 억제시키면서 관리하는것이 중요합니다. 이번에 애틀랜타에 한달먼저 들어간 것도 다 그 때문이지요
한국마라톤의 앞날이 불투명하다는 전망에 대해 그는 아니, 한국마라톤의전망은 밝습니다. 좋은선수들이 계속 나오리라고 봐요 라며 손을 내젓는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그는 담담하게 이어갔다. 세계정상이 유지되어야하는데 이게 이루어질지걱정이고 나로서는 이제 일선에는 그만 나섰으면 하는 생각도 있는데 시드니올림픽도 남아있고…정감독의 고향에 대한 각별한 애정은 마라톤에도 이어지고있다. 그는 김천에코오롱팀의 합숙소를지어놓고 큰 대회에 나가기전에는 반드시 하루 50㎞의 로드웍 훈련을 하늘아래 첫동네 라는 김천의 남승령고개에서 해왔다. 주변경관이 좋고 군사도로라 교통량도 많지않아 로드웍훈련코스로그만한 코스는 다시 없습니다
군생활에서 몸에 밴 엄격한 자기관리를 바탕으로 한국마라톤에 제2의 중흥기를 이룬 그는 하면된다는게 나의 인생철학입니다 며 거듭 의욕을 보인후 4년후 시드니올림픽때까지는 일선에서 뛸작정 이라고 밝혀 마라톤외곬인생 을 고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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