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보사태 이후 공직사회를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선이 곱지 않다. 누구 하나 책임지고 나서는 사람이 없으니 '깃털론'처럼 낯뜨거운 책임회피 싸움판이 벌어진다. 상상을 초월한 은행대출이 이뤄졌지만 재정경제원 장관은 물론 여신관리 담당자도 "나는 모른다"며 발뺌이다. 은행감독원, 감사원 역시 불똥이 튈까 잔뜩 몸을 사리고 있다.
국정의 막대한 책임을 분담하고 있는 청와대고위공직자들도 공인정신에 의한 윗분보좌보다 가신같은 행동으로 일관, 대통령의 눈과 귀를 가려 25일같은 참담한 심정으로 사과까지하는 사태로몰고 갔다고 비판받고 있다.
공무원들의 책임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얼마 전 이수성 국무총리가 공무원의 무한책임론을 제기했지만 오히려 여론 무마용이란 비난만 샀다. 80년대 미국의 저명한 행정학자 프레스더스(R.Presthus)의 책임론은 우리나라 공직사회에 암시하는 바가 크다. "행정부 최고 책임자를 위시해모든 관료들은 권한과 의무에 대한 윤리적, 법률적 책임을 져야 한다"
5조원이란 천문학적 돈이 한 기업체에흘러들어간 경위까지 모든 권한과 의무에 대해 관료들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책임을 통감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대구시 모 구청 국장은 "지위가 높아질수록 자리에 연연하고 결국 소신이나 의욕도 없이 보신주의로 흐른다"며 "결국 복지부동(伏地不動)이나 복지안동(伏地眼動)은 공무원 스스로 자초한 것"이라고 털어놨다.
지방자치제 실시 이후 이같은 현상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공무원의 꽃'이랄 수 있는 구청장, 군수, 시장 자리까지 민선에 내 준 마당에 굳이 억척스레 일할 필요가 없다는 것. 한보사태가 터진뒤 땅바닥에 바짝 엎드린채 귀동냥에 바쁜 공직사회의 모습은 차라리 안쓰럽기까지 하다.지난 93년 일본경제신문사는 '공무원의 도전'이란 책을 펴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패기찬 공직사회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일본은 프랑스와 함께 세계에서 관료주의가 가장 강하게 확립된나라. 집권당이 어떻게 바뀌든 국가기본시책은 흔들리지 않는다. '공무원의 도전'은 묵묵히 책임을 다하는 행정 관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책 속에 나오는 흥미있는 사례를 하나 들어보자. 히가시카모 군(郡)에 근무하는 호리(40)라는 산림공무원은 어느 날 아스케 정(町:행정단위)이란산골벽지로 부임한다. 첩첩산중에서 2년을 혼자 지내야 한다는 생각에 호리씨는 착잡했다. 그러던 중나무에 둘러싸여 묵묵히 일하는 산골 노인을 보며 호리씨는 깊은 감명을 받는다. 그때부터 주민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발로 뛴다.
소외된 산골 마을. 주민들은 발전을 원했다. 호리씨는 이들의 바람을 알아차렸고, 자진해서 1년을더 근무한 끝에 주민들이 직접 운영하는 목조주택 건설회사를 세우기에 이른다. 3년 파견근무를마친 호리씨는가슴 벅찬 보람을 느낀다. "누군가 해야 할 일을 한거야"몇 해 전 영국 리버풀에 진출한 국내 대기업 한 간부는 "선진국은 행정부터 선진"이라며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다.공장 설립부터 관계 공무원들이 직접 현장에 나와 필요한 서류를 알려주고 미비한 점을 지적해주었다는것. 공장 하나 세우려면 은행과 관공서 문턱이 닳도록 들락거려야 하는 우리 실정과는차원이 다르다. '레드 테이프(Red Tape:까다로운 관료적 형식주의)'의 본고장 영국에서도 관료주의는 찾아볼 수 없었다.
다시 우리 문제로 눈을 돌리자. 지난해 대구 중구청은 대구시와의 일전(一戰)을 준비한 적이 있다. 문제의 발단은 시로부터 재정교부금 형식으로 받는 노상주차장 수익. 지자체 출범으로 20m미만 소방도로 관리가 구청으로 이관된 만큼 노상주차장 수익도 관리자에게 돌아와야 한다는 주장이다.
서울시는 96년 시조례를 개정해 이를 시행했다. 그러나 대구시는 아직 돌려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구청이 요청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앞장서서 책임지고 일을 추진한 사람이없었다. 중구청 모 계장은 이렇게 털어놨다. "직급이 올라가면 인사(人事)문제에도신경을 써야 하는데 함부로 말썽을 일으키려는 사람이 있습니까. 뻔히 해야 할 일인 줄 알면서 서로 눈치보고책임만 떠넘기는 거죠. 지방자치라지만 아직도 하급기관은 상급기관 눈치보기 바쁩니다"95년 초세계화가 유행처럼 번질 무렵 '국제화, 세계화에 있어 가장 큰 문제가 되는 우리나라 국민의 성격은 무엇인가'라는 여론조사가 행해진 적이 있다. 이때 1위로 꼽힌 것이 '금전만능주의'(27%%)이고 다음이 '무책임성'(22%%)이었다. 한보사태는 물론 이 과정에서 불거진 공직자들의 발뺌은 이처럼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사회가 불안하고 경제가 흔들릴수록 '월급쟁이가 최고다'는 말이 감초마냥 등장한다. 아무리 사회가 불안해도 공무원은 안정된 직장이 보장된다는 것을 뜻한다.
즉 공무원의 직위, 신분에 대한 보장은 국민에 대한 책임과 보장을 전제로 하지만 무사안일, 복지부동의 공무원들은 이를 '자기보장'의 수단으로만 치부한다. 적극적이고 창의적인 행정은 바로 이같은 '자기보장'을 국민을 위한 보장으로 돌릴 때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다.
공직사회의 느슨해진 분위기를 나무라는 계명대 행정학과 최봉기 교수(48)의 일침은 따갑다. "아무리 사회 전반에 부패가 만연해도 공직자만은 여전히 청렴하고 공정하며 책임감이 투철해야 한다. 그것이 공직자이며, 국민이 바라는 바이다" 〈金秀用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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