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대구금융100년(12)-대구은행(5)

1975년5월15일 열린 제15기주총에서는 대구은행 창립의 주역 김준성행장이 퇴임하는등 창립이후최대의 임원진 개편이 있었다.

7년7개월동안 초대행장으로 있으면서 신설은행을 예수금 4백60억원, 대출금 5백2억원, 점포수 33개, 직원 1천여명의 중견은행으로 육성시킨 김행장은 지방은행장 출신으로는 이례적으로 시중은행인 제일은행장으로 영전하게된다.

그후 김행장은 외환은행장, 산업은행총재, 한국은행총재, 부총리겸 경제기획원장관등으로 승승장구하면서 지역경제계의 대부역할을 하게된다.

현재 이수화학회장인 김행장은 대구은행을 떠난지 21년만인 지난2월27일 40기주총에서 비상임이사로 다시 대구은행과 인연을 맺게된다.

2대행장에는 창립멤버인 남옥현전무가 선임됐다. 김행장이 창립의 주춧돌을 놓았다면 남행장은그위에서 대구은행을 떠받치는 골격을 세운 주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15기 주총에서는 당시8명의 임원중 정달용상무, 권태학이사를 제외한 6명이 바뀌었다.

남옥현행장으로 조타수를 바꾼 대구은행은 76년 들어 외환업무 확대에 총력을 경주하게된다. 남행장은 76년 신년사에서 "금융의 국제화시대를 맞아 외환업무의 신장과 업무영역확장 없이는 대구은행의 발전은 있을 수 없다"며 외환확대를 선언한다.

이에따라 당시 걸음마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있던 지역금융가에는 외환바람이 불기시작했으며 대구은행은 해외 4백개 은행과 코레스(환거래)계약을 체결하게된다.

해가 바뀐 77년은 대구은행 창립 10주년이 되는 해.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지만 대구시중구동문동 대구상의 건물 한쪽을 빌려 1억5천만원의 자본금과 1개점포, 43명의 직원으로 출범한 대구은행은 10년만에 44개 점포망에 임직원 1천5백46명을 거느린 지역중추은행으로 뿌리를 내리게된다.또 전국 금융기관중 최고배당을 계속하면서 점포수는 대구시내 금융기관의 42.1%%, 예금고는49.3%%를 점유하게된다.

78년들어 대구은행은 대형화, 국제화를 새로운 지표로 삼게된다. 이해들어 두차례 증자를 거쳐 자본금을 1백3억원으로 늘렸으며 전산화를 위해 컴퓨터 시스템을 도입, 79년에는 본점영업부와 서울지점간 온라인업무를 개시한다.

현재 전국은행중 최고수준을 자랑하는 대구은행의 전산시스템은 73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73년11월 금융단 전자계산본부에서 주관하는 EDPS기초교육에 2명의 직원이 참가한 것이 효시.76년에는 동산(動産)관리등 3개업무, 77년에는 유가증권등 4개업무가 전산화됐다. 77년12월에는본점에 전산과가 설치됐으며 78년에는 국내 은행사상 처음으로 독립전산소 건물이 준공됐다.79년에는 국제화의 교두보인 뉴욕사무소를 설치하게된다. 초대 뉴욕사무소장에는 서덕규현행장이취임한다. 대구은행은 뉴욕사무소설치를 계기로 미국내 환거래은행과 직접 접촉, 신용공여 한도의증액을 이뤘으며 뉴욕 국제금융시장을 통해 국제금융의 효율적 자금관리를 할수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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