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제10회 매일여성백일장 최우수작(2)

"산문부문-고향지기" 아버지는 유복자이시다. 6·25가 터지던 해 할아버지는 나라를 위해 싸우다 돌아가시고 할머니는피단길에서 아버지를 낳으셨단다. 50년 세월을 살아오시면서 단 한순간도 떨어지지 않고 따라다녔던 유복자라는 꼬리표 때문인지, 아니면 한평생 농군의 삶을 고집하시며 고생하신 까닭인지 아버진 유난히 과묵하고 무뚝뚝하시다.

아버지는 6남매중 막내딸로 곱게 자라 시골로는 절대 시집가지 않겠다던 엄마에게 결혼하면 도시로 나와 공무원이 되겠노라고 약속을 하셨단다. 엄마는 어릴때부터 부모님의 힘든 농촌생활을 보아온 터라 시집은 꼭 도시로 가겠다는 생각을 해 왔었고, 월급쟁이 남편을 만나더라도 그 돈으로저축하고 살림하며 아이낳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소박한 꿈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결혼과 동시에엄마의 꿈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달콤한 결혼생활을 꿈꾸었던 엄마의 현실은 일찍 혼자되신시어머니 모시기에다 과수원, 논, 밭농사일까지 도맡아 해야 하는 맏며느리 자리였다.우리집엔 벌써 몇대째 물려오는 큰 과수원이 있었는데, 할머니는 혼자서 어린 자식 둘만을 바라보며 그 큰 과수원을 지켜내셨다. 아버진 그런 과수원을 버릴 생각이 애시당초 없으셨던 것이다.시청에서 국가유공자 특혜로 공무원이 될 자격이 주어졌다는 공문이 여러번 왔었지만 아버진 요지부동 지금의 자리를 고집하셨다. 엄마는 결혼을 목적으로 아버지께서 마음에도 없는 약속을 하신데 크게 실망을 하셨고, 뼈빠지게 농사를 지어도 각종 사료값에 비료와 약값을 대고 나면 남는것도 없고 그나마 자연재해로 인한 피해가 다반사인데 무슨 희망이 있냐며 틈만 나면 도시로 나가살자고 아버질 졸랐다. 점점 그 투정이 잔소리가 되어갔지만 아버진 그런 엄마의 도시타령을귓등으로도 듣지 않으셨다. 아버지의 야속한 모습에 애를 태우다 급기야 엄마는 고된 시골살림과할머니의 시집살이를 이겨내지 못하시고 가출을 하셨다. 아버진 그런 엄마의 철없던 모습까지도이해를 하시고 수소문 끝에 찾아서 다시 집으로 데려오셨단다.

"미안하다. 매일 힘든 일만 시키고. 사실 처음부터 도시로 나갈 생각은 없었어. 과수원은 대대로내려오는 우리집 가업이고 어머니도 여자의 몸으로 꿋꿋이 지켜오셨어. 저 일들을 버릴 수가 없다구.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이 일을 평생 당신과 함께 하고 싶었던거야. 나를 이해해 줄수 없겠니?"

도저히 과수원과 농사일을 버리지 못하시겠다는 아버지의 굳은 마음을 읽고 엄마의 생각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날이후 엄마는 할머니도 잘 모시고 아버지께 새참까지 해다 나르는 열성을 보이며 그 누구보다도 성실하고 부지런한 시골아낙이 되어갔다.

그렇게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때때로 지금이라도 도시로 나가 살지 않겠느냐는 엄마의 농담에 아버진 이번에 집을 나가면 다신찾으러 가지 않겠다시는 대답으로 웃어 넘기곤 하셨다.

뒷산 나무들이 푸르름의 마지막 자태를 뽐내던 그해 여름 어느날이었다. 아버지 앞으로 한통의통지서가 날아왔다. 그 봉투를 열어본 아버지는 말도 없이 집을 나가셨고 다음날 새벽 술이라곤한모금도 마시지 못하시는 아버지께서 소주 두병을 혼자 마시셨다며 구멍가게를 하는 친구분 등에 업혀 인사불성이 된 채 들어오셨다. 평소 사람좋기로 유명하고 어려운 부탁도 쉽게 거절하지못하시는 아버지.

지난해 도시 친구의 부탁으로 보증을 선 일이 있었는데 그 일이 기어이 터지고 만 것이다. 친구분이 엄청난 돈을 대출해서 사업을 벌였는데 사업이 망하자 어디론가 숨어 버렸고 대출이자 납기일이 지나버리자 고지서가 우리집으로 날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친구가 나타나지 않으면 이자 뿐아니라 원금까지 우리가 책임져야 한다고 했다. 우리가족에겐 그야말로 청천벽력같은 소식이었다.20년을 모은 전 재산을 엉뚱한 곳에 넣어야 한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아버진 무엇보다 믿었던 친구에 대한 배신감에 충격이 크신 듯했고 할머닌 앓아 누우셨다. 엄마는 왜 믿지도 못할 친구 보증을 섰냐고 울고 불고 악다구니라도 쳐야 속이 시원하셨겠지만 누구보다 힘들어 하시는 아버지 앞에서 그럴 수가 없었는지 오히려 허탈한 모습이었다. 아무런 대책없이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사이 시간은 흘렀고 우리집 과수원과 전답은 남의 손에 넘어갈 상황이 되었다. 그때 며칠사이 몰라보게 초췌해진 아버지께서 무슨 큰 결심을 한 듯우리를 모아놓고 말씀하셨다.

"떠나자, 이제 우린 빈손이야. 당신 도시에서 살고 싶댔지? 그래 가자. 가서 막일이라도 하자. 너희들한테 미안하구나"

늘 사람좋은 웃음을 잃지 않고 여유있는 모습의 아버지였는데 얼마나 충격이 크셨는지 이제 더이상 예전의 아버지 모습이 아니었다. 아무런 희망이 없는 듯 절망하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있었다. 전부를 바쳐 일해온 대가가 물거품이 되어 버리자 아버지가 받은 충격과 또 그 충격으로인해 내려진 아버지의 결단은 우리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내가 더 놀란 건 어머니의모습이었다. 늘 약해만 보이던 어머니께서 너무도 침착하고 느긋한 모습으로 우리집 통장을 모두내놓았다.

"우리집 통장 전부예요. 이건 우리가 살면서 모아온 통장이고, 이건 애들 앞으로 적금 든 통장,이건 어머님 통장, 그리고 이건 내가 생활비 한푼 두푼 아껴서 만든 통장이예요. 이 돈은 집 지을때 보태려고 했는데…. 그래서 당신 놀래주려고 했는데…. 여보! 그동안 도시로 나가 살자고 했던거 철없이 한 얘기예요. 당신 여기 뜨자고 했죠? 이젠 제가 안되겠어요. 우선 이 돈으로 급한 불부터 꺼요. 그리고 빚을 지더라도 우리 과수원은 절대 못 넘겨요. 제가 지킬 거예요. 우리 힘내요,네?"

나는 늘 도시를 꿈꾸던 엄마가 그런 말씀을 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엄마 역시 농사를 짓는일에 모든 걸 걸고 계셨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 큰 절망앞에서 무너지려 하시는 아버지께 큰 지팡이가 되어주시는 엄마가 얼마나 위대해 보였는지 모른다. 우리는 그날 모두 한데 엉겨 한참을울었다. 그렇게 해서 아버지와 어머닌 다시 일어서기 위해 맨손으로 시작하셨고, 5년이 지난 지금그동안의 빚도 다 갚으셨다.

어려운 시기에 대학입시를 치르게 되어 나는 평소 희망했던 국문학과의 꿈을 접고 전문대학을 진학했다. 열심히 한 결과 장학금도 타고 졸업해서 이젠 사회생활 2년으로 돈도 꽤 모았다. 나는 그돈을 모두 우리집이 일어서는데 보탰다.

지금 아버진 할아버지의 아버지, 그 아버지의 아버지, 몇대째 물려져 내려오는 농사일을 한치의부끄러움도 없이 지켜 오신 자부심이 대단하시다. 가난한 농군의 아들로, 그것도 유복자로 태어나지켜온 그 힘겨운 길이 어쩌면 당신께는 그 어떤 훈장보다 자랑스러운 것인지도 모르겠다.나는 누구보다도 아버지 어머니 두분을 존경한다. 도시로 나와 무엇을 한들 지금만큼이야 못살았을까마는 끝까지 농촌을 지키는 고향지기의 길만을 고집하셨던 아버지. 그리고 그분 뒤에서 아낌없는 뒷바라지를 해오셨던 어머니. 시련이 닥칠때마다 서로에게 등받이가 되어주며 일어서셨던두분모습보다 아름다운 모습이 또 있을까. 비록 작은 행복을 꿈꾸던 두분께 시련도 적지 않았지만 두분은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고향지기의 길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시련이 닥치면또 어떠랴, 이제 두분께는 어떠한 시련도 이겨낼 수 있는 사랑이 있고 고향을 지키며 욕심없이살아온 길의 자부심과 행복이 가득한데….

그래서 나는 두분의 길을 사랑한다. 어쩌면 나 역시도 두분처럼 줏대있는 하나의 길을 걸어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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