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란 쿤데라의 소설 '느림'에 대한 평문에서 한 서평자는 전설처럼 들리는 신비한 이야기 하나를소개해준다. '옛날 중국에 추앙추라는 유명한 화가가 있었다. 어느날 황제가 그에게 게 하나를 그려달라고 했다. 추앙추는 열두명의 시종과 집 한채, 그리고 5년의 시간을 달라고 했다. 하지만 5년이 흘렀으나 그는 아직 그림을 시작하지도 않았다. 추앙추는 5년을 더 달라고 했고 황제는 이를 수락했다. 10년이 거의 지날 무렵 추앙추는 붓을 들어 먹물에 찍더니 한순간에 단 하나의 선으로 이제까지 보았던 것 중에 가장 완벽한 게를 그렸다'
이 이야기 끝에 필자는 다음과 같은 물음 던지고 있다. '이는 느림을 칭찬한 것인가 아니면 속도를 칭찬하는 것인가'
'빠름'과 '느림'에 대한 경멸
내가 볼때 이것은 잘못 물어진 물음이다. 여기서 추앙추가 보여주는 것은 그림 그리기에서의 빠름이나 느림이 아니다. 그는 단지 창작의 과정을 치열하게 버티어낸 한 화가의 삶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그는 10년 세월동안 하나의 작품을 위해 살았고 마지막에 그것을 완성한 것에 지나지않는다. 속도에 관해 이 이야기가 보여주는 게 있다면 그것은 빠름이나 느림에 대한 찬양이 아니라 빠름과 느림이라는 개념자체에 대한 조롱이고 세상사를 오직 속도로만 판단하려는 태도에 대한 경멸일 터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이미 한세대 전에 미래 산업사회에서의 진정한 전쟁은 속도와의 싸움일것이라고 예측하였다. 오늘날 도처에서 '좀더 빠르게' '더욱더 빠르게'를 외치며 격렬하게 치루어지는 사활 건 다툼들을 보노라면 이것이 빗나간 통찰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토플러가 생각하지 못한 전혀 다른 종류의 속도와의 싸움도 있다. 그것은 추앙추 이야기가 암시해주듯속도의 광폭한 권력과 맞서는 싸움이다. 여기서 승리한다는 것은 물론 느림이나 천천히함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유, 창조, 열정, 낭만등을 잃지 않고 즐겁고 기쁘고 여유롭게 살아가는 것을의미한다.
나도 매일 이 전선에서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 가령, 나는 일곱개가 넘는 출근길을 갖고 있으며날마다 그것들을 번갈아가면서 이용한다. 아마 같은 동네에 사는 직장동료들에게 '출근하는 길이일곱개가 넘는다'고 한다면 그들은 필경 내가 농담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들의 머리 속에서는오직 한가지 길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가장 빠른 길이다. 그들에게는 이것만이 '길'이고 다른것은 길이라기보다는 비상구일뿐이다. 어쩌다 그 길이 차의 홍수로 막히거나 다른 볼 일이 있을때 가끔 빠져나가는.
바로 이웃에 사는 한 동료는 내가 적어도 사흘에 한번은 이용하는, 조금 둘러서 가는 길을 지난5년동안 한번도 가보지 않았다고 말한다. 겨우 10분정도 더 걸리는 길인데도 말이다. 그래서 그는이전보다 훨씬 다채로워진 거리의 풍경들, 가령 바뀐 건물들의 스카이 라인이나 새로 바꿔 단 간판들의 현란한 색채들을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이다. 5년, 아아 그것은 긴 세월이다. 어떻게 그럴수 있는가. 인간의 다람쥐 쳇바퀴는 이런 식으로 만들어지는가 보다.
조금 빠르거나 늦을뿐
물론 나도 바쁠 때에는 빠른 길로 간다. 그러나 그렇게해서 빨리 도착한 5분, 10분의 시간으로 내가 바꾸어놓은 삶의 역사는 없었다. 살아가는 숱한 날들 중에서 그저 그날은 조금 빠르거나 조금늦거나한 것뿐이다.
살아서 뿐만아니라 죽어서도 여전히 많은 사람을 웃기고 있는 영국 작가 버나드 쇼가 생각난다.그의 묘비명에는 이런 말이 쓰여있다. '우물쭈물 하다가 이럴 줄 알았다' 나또한 별수 없이 '이럴줄 알'더라도 그냥 우물쭈물하면서 살고 싶다. 주저함과 망설임이 단지 허망하고 속절없는 시간낭비만은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가 시간의 흐름을 더 첨예하게 느끼고 삶의 안타까움을 더욱 절절하게 느끼는 것은 바로 그런 순간들일 것이다.〈부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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