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왜 풍장인가?
존재는 얼마나 갑갑한가. 우리는 자주 이러한 의문과 더불어 인식의 놀라운 반란을 체험한다. 그때 주변의 현상 세계는 우리의 의식 속에 새롭게, 그리고 활발하게 구성되기 시작한다. 이 순간,모든 대상은 단순한 외물(外物)이 아닌, 의미있는 표상으로 떠오른다. 삶에 대한 깊은 반성과 성찰, 여기서 황동규의 시집 '풍장'을 만난다.
'풍장'은 황량한 세계를 떠돌며 존재의 빛과 어둠, 죽음의 문제를 사색하여 기록한 비망록이다. 그렇다면 황동규가 왜 이러한 문제에, 그것도 풍장이라는 제의적 형식을 통해 오랜 시간을 매달려왔는지 궁금하다. 이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우선 삶과 존재에 대한 시인의 인식 구조를 밝혀야한다.
인간은 실존적으로 고독한 개체이다. 이 개체는 하이데거(M. Heidegger)의 말처럼 시간 속에서는필연적으로 죽음의 충격을, 공간적으로는 낯선 '거기'에 던져져 세계와의 불안한 관계를 체험해야할 존재이다. 이 가볍고 무의미한 현상 세계에 우리의 전생애는 심각하게 노출되어 있다. 그러나세계의 밤이 도래한 옹색한 시대에도 시인은 "깨어 있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풍장18')라고되뇌며 혼자 고뇌한다.
불 끄려다 석곡란에 물 주며
몇마디 말 중얼거리다 말고
언제부터인가 가까이 다가오는
인간의 뒷모습.
-'풍장 64'에서
무의미한 일상의 사물들, 익명적 존재로서 관심 밖에 은폐되어 있던 대상들은 시인이 지핀 내면의등불 앞에 감춰진 비밀을 드러낸다. 문득 잠에서 깨어 그의 의식이 '석곡란'을 지향하자, 언젠가생기를 잃고 시들어 버릴 '인간의 뒷모습'이 통찰된다. 존재의 안쪽에서 피어 오르는 허무의 연기가 시인의 의식에 감지된다는 것, 이는 '풍장'의 기층적 의미가 무엇인지 잘 암시해 주고 있다.존재에 대한 이러한 깨달음은,
이슬비가 안개를 벗기기도
안개가 이슬비를 다시 감싸기도 했다.
다람쥐 몇마리 뛰어다니기도.
눈앞에서 금방 사라질 것들!
-'풍장 46'에서
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안개, 다람쥐'등의 대상은 시인의 의식 작용과 관계하여 새로운의미로 나타난다. 이때 그의 가슴은 떨리게 되며 모든 생명체의 운명에 대한 작은 깨달음에 이르른다. 이 각성은 '눈앞에서 금방 사라질 것들'에 대한 연민으로 변주되고 있다. 시인의 마음은 이처럼 존재의 소멸과 죽음이라는 문제 앞에 몹시 흔들린다.
이런 관계에서 볼때, 우리는 왜 황동규가 풍장이란 통과 의례에 그토록 끈질기게 매달려 왔는가를비로소 깨닫게 된다. 그것은 시간 속에서 존재의 해체 과정을, 또한 공간 속에서 세계의 변방에던져진 인간의 비극적 운명을 극명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싸늘한 주검이 풍화되어가는 낯선 때와곳, 이 처지성이야말로 실존이 모든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한 극점임이 분명하다.2. 시간, 죽음 그 너머의 새로운 열림
시간에 관한 일반적 의미는 그것이 과거, 현재, 미래라는 객관적 인과율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같은 강물에 두번 발을 담글 수 없다는 말처럼, 우리의 전생애는 시간의 계기성과 가변성에운명적으로 노출되어 있다. 이러한 시간의 물리적 질서는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 왜냐하면 스스로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모든 것을 냉혹한 법칙에 맡겨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에 이르러 시간에 대한 체험 방식엔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이 변화란 한스 마이어호프(H. Meyerhoff)의 지적처럼 '시간적 퍼스펙티브의 위축' 또는 '경험의 파편화' 현상을 의미한다. 순간의 충동과 일회성의 감각만이 어두운 그림자로 드러워질 뿐, 더 이상 과거와 현재, 즉자와대자, 현상과 근원 사이를 이어주던 아름답고 푸른 끈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속물적 시간, 고립되거나 훼손된 시간, 영원한 로고스가 빛을 잃어버린, 불확실한 시간의 터널을 우리 모두는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저 불면의 밤들,
아무리 취해도
코고는 일행을 끝 점검하고 비로소 자리에 눕던
저 불면의 밤들,
-'풍장 39'에서
낯선 객지에서 시인이 온몸으로 감내해야 하는 '불면의 밤들'은 시간 체험의 일면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불면증은 모든 것이 운명적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점, 혹은 고립된 시간속에서 스스로의 삶을 가늠할 수 없다는 불안감에서 비롯된다.
그렇다면 시인은 왜 잠을 이루지 못하고 고민하는가? 여기서 그는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죽음의문제와 맞부딪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황동규는 이 문제에 십수년간 집착해 왔다. 그러나 그는 죽음을 작위적으로 망각하거나 회피함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명상함으로써 더욱 넓은 시의 지평을 열어주고 있다.
내 세상 뜨면 풍장시켜다오.
섭섭하지 않게
옷은 입은 채로 전자시계는 가는 채로
손목에 달아놓고
아주 춥지는 않게
가죽가방에 넣어 전세 택시에 싣고
-'풍장1'에서
시간의 인과율에 얽매인 인간의 종말이 함축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미래를 앞당겨 자신의 죽음을꿰뚫어 보았을 때, 삶의 끝은 참담하기 그지 없다. 아직도 시간을 멈추지 않은 '전자시계'는 시인의 지향적 의식과 상관하여 비극적인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무인도라는 낯선 땅, 오직 바람뿐인그 허무의 변방에서 혼자 외롭게 드러누워 탈골되어야 한다는 데 그의 고민은 깊어간다. 그러나그는 이 비극적 운명에 자신의 삶을 그냥 방치해 두지 않는다. 현상계의 시간율을 정신적으로 벗어나거나 초월함으로써 그것을 극복하고자 한다.
남몰래 시간을 떨어뜨리고
바람 속에 익은 붉은 열매에서 툭툭 튀기는 씨들을
무연히 안 보이듯 바라보며
살을 말리게 해다오.
-'풍장1'에서
시인은 규범적 시간의 덫과 허무의 사슬에서 벗어나, 더욱 자유로운 존재로 변화되고자 한다. 그러므로 일상의 시간을 '남몰래 떨어뜨리'며, 하마트면 영원한 즉자(卽自)로 풍화되어야 했던 자신의 운명을 존재론적으로 전환하고자 한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 점은 황동규가 고단한 현세적 삶도아주 소중히 여기고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그의 일탈은 증발식 기화 현상이 아니라, '귀' 하나쯤은 열어둔 채 삶과 죽음, 순간과 영원, 존재와 근원을 껴안는 다층적 상승이다. 따라서 현상계를껴안고 그것을 뛰어넘으려는 역설적 초월 의식은 '풍장'이 지닌 독특한 의미이다.그렇다. 이제 시인에게 죽음 또는 소멸이란 삶과 절연된 것이 아닌, 존재 방식을 조금 달리하는가벼운 파장에 불과한 것이다. 여기서 시인의 가슴은 영원의 기슭에서 밀려오는 창조적 시간의 물살에 젖는다.
3. 공간, 세계의 낯설음과
가벼운 상승
인간은 시간 속에서 자아를 실현해가듯이, 주어진 공간 속에서 스스로의 삶을 선택하고 이루어가적, 시대적 울타리를 벗어날 수가 없다. 이 곳에 우리는 외롭게 던져져 있으며, 때로는 그로부터벗어나 능동적인 삶을 회복하고자 한다. 그러나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거대한 벽 앞에 인간은 대개 불가항력적인 무력감을 느끼거나 절망하고 만다. 여기서 세계는 삶의 소박한 공간이 아닌, 비극적인 한계 상황으로 다가선다.
이때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모든 것을 회피한 채 타율적인 질서에 따르거나, 아니면 그 절망적 처지에서도 새로운 실존 가능성을 모색하는 일이다. 대개의 경우 사람들은 빛을 찾으려는 괴로운 자유보다, 타율의 물결에 실려 안온한 삶이 보장된 즐거운 부자유를 더 좋아한다. 그 결과인간은 주어진 삶에 피동적으로 몸을 맡기는 운명론자로 전락한다.
가방 속에서 다리오그리고
그러나 편안히 누워 있다가
선유도 지나 통통 소리 지나
(……)
가방 벗기우고 옷 벗기우고
무인도의 늦가을 차가운 햇빛 속에
-'풍장1'에서
시인의 삶이 끝나는 비극적 공간은 '선유도'라는 작은 섬이다. 이 곳에서 그는 모든 것을 '벗기우고' 외롭게 방치된다. 시인의 주검을 방기(放棄)하는 자는 누구인가? 그것은 어쩌면 세계 속에 충만해 있는 어둠의 아들, 허무의 기류인지도 모른다. 시인은 이들에게 목숨의 끝을 의탁하고 바람뿐인 무인도에서 조용히 풍화되기를 갈망한다. 이 염원은 인간의 실존적 기상도를 미리 해독한 시인의 예지에서 비롯된다. 그의 이러한 비극적 통찰은 자신이 처한 공간에 있어서도 예외가 아니다.
안경 없이 찾아가다 문득 길을 잃어
안개 낀 골짜기와 언덕을 헤매다가
(……)
멍청한 개처럼 걷다가
뜻 없이 컹컹 짖어…
-'풍장8'에서
시인은 자신이 처한 위치가 어디이며, 몇 시인지 모른다. 그는 '길'로 상징되는 존재의 좌표를 상실한 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이때 세계는 '안개 낀 골짜기'로 그의 의식을 짓누른다. 우리가살고 있는 세계는 한갖 허상에 불과할 뿐, 고통과 냉소의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그러므로 이 세상은 끝없는 허무가 잠시 순간의 빛깔로 모습을 드러낸 가현상(假現像)에 지나지않는다. 여기서 시인은 삶과 존재에 대해 심각한 낯설음을 체험한다. 이 때의 소외감은 스스로를'멍청한 개'에 비유함으로써 절정에 다다른다.
인간이 세계에 대해 낯설음을 느낀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일차적으로 자아와 대상 간의 균열 현상을 뜻하기도 하지만, 근원적으로는 자기로부터의 단절감을 의미한다. 따라서 현실적 자아와 근원적 자아, 현상적 자아와 본질적 자아는 분열되고 인간은 자기 안에서 심각한 소외감을 느낀다. 그러므로 이 상황을 초극하기 위해 어떤 결단이 필요하다. 여기서 그는 현세의 집착이나 미련에서 벗어나 열린 공간으로의 떠돌기를 결행한다.
땅속에 발목뼈 채 묻히지 못해
한없이 떠도는 원혼(寃魂)이 된들 어떠리.
원혼 가운데서도
새처럼 가벼운 원혼,
-'풍장37'에서
시인은 자신의 세속적 몸무게를 줄이고 현실로부터 가볍게 벗어나기를 꿈꾼다. 즉 자기의 영혼에가득 찬 집착과 미련의 거품을 빼 버리고, 즐겁게 상승할 수 있는 부력을 회복고자 한다. 그러므로 이 시에서 '가벼움'의 이미지는 깊은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단순한 체중 감량이 아니라, 끝없는 우주 속으로 자유롭게 비상하기를 꿈꾸는 존재의 상승 작용이다.
결국 낯선 세계로부터의 탈출은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찾기 위한 창조적인 행위이다. 끝없이 열린우주와 공간 속으로 가볍게 파닥여감으로써, 시인은 존재의 참된 자유를 만끽하려 한다. 모든 것을 껴안고 대자연과 우주의 품안으로 회귀하려는 가벼운 날개짓에는 원초적인 해조음(諧調音)이묻어 나온다.
풀잎의 한 가닥으로
사근사근 말라
몸의 냄새를 조금 갈고
(……)
빨간 꼬리들을 달고 날아다니는 공간 속으로
잠자리채 높이 쳐든 소년이 되어 들어가리.
-'풍장 32'에서
시인은 자신을 짓누르는 삶의 무게에서 벗어나 마른 '풀잎의 한 가닥'으로 비상하기를 갈망한다.이제 고뇌하던 현실적 자아는 사라지고, 부연의 순수한 자아가 '잠자리채 높이 쳐든 소년'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 결과 시인은 자신을 억압하던 죽음에의 불안과 삶의 불확실성에서 벗어나 가볍게 뜨는 법을 터득하게 된다.
이렇게 볼때 '풍장'에 나타난 공간 체험 역시 어떤 희망을 안겨 준다. 이미 시간 체험에서도 드러났듯이, 그것은 어둠과 허무에서 출발하여 빛과 존재의 근원으로 은밀히 지향되고 있다. 주어진처지성을 소극적으로 받아들임이 아니라, 의식 속에 적극적으로 재구성함으로써 시인은 존재의 비약을 꿈꾼다.
4. 존재의 근원, 바람 속의 귀향
이 세상이 불안과 소외감을 안겨 주는 한, 우리는 불현듯 모든 관계에서 벗어나 아름답고 영원한세계로 떠나기를 갈망한다. 시시각각 밀려드는 죽음에의 불안, 세계의 변방에 던져진 실존의 비극은 필연적으로 어떤 초월 의지를 갖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승 의지는 어둠의 너울을 잠시 벗어나는 일회용의 몸짓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간절한 염원을 품고 있다. 그러므로 초월 세계에 대한지향은 존재론적 개념을 지닌다. 삶의 허무가 깊어갈수록 인간은 빛으로 가득찬 생명의 요람으로돌아가기를 강렬히 꿈꾼다. 왜냐하면 하이데거가 상기시켰듯이 '시인이란 존재의 근원으로 끝없이귀향하는 자(Der Beruf des Dichters ist die Heimkunft, …)'이기 때문이다.
'풍장'의 궁극적 의미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시간적 불안과 공간적 낯설음에 처해있던 시인은 마침내 의식의 상승 작용을 통해 근원적 처소로 되돌아가고자 한다. 이러한 귀향 의지는 우선 자기 동일성에 대한 갈망으로 나타난다.
원래의 편안한 모습으로 되돌아가려는,
저 본능!
-'풍장21'에서
시인은 존재의 본향으로 돌아가기를 꿈꾼다. 눈을 감거나 귀를 열면, 내면 깊숙한 곳에서 울려오는 영혼의 소리가 시인을 부르고 있다. 그 부름에 응답하여 그는 지금까지 잃어 버렸던 참된 자아를 회복하고자 한다. 그렇다. 주체적으로 극복하려는 의지와 무관하지 않다. 이 자기 회복의 몸짓이 더욱 세계를 향해 열릴때, 자연 또는 영원과의 합일을 갈망하는 의지로 나타난다. 우선 자연과의 일체를 바라는 시인의 꿈을 보자.
①이불 여미듯 바람을 여미고
마지막으로 몸의 피가 마를 때까지
바람과 놀게 해다오.
-'풍장1'에서
②선암사 매화 처음 만나 수인사 나누고
(…)
나는 매화의 내장 밖에 있는가,
선암사가 온통 매화,
안에 있는가?
-'풍장 40'에서
자연은 시인에게 있어서 단순한 완상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이불 여미듯 바람을 여미'(①)며누워야 할 영혼의 안식처, 또는 물심일여(物心一如)를 극대화할 수 있는 일체감의 공간(②)이다.특히 ②는 장자(莊子)의 호접몽을 연상시킬 만큼 주객일체의 의미가 함축적으로 드러나 있다. 실존의 밑바닥에 허무의 안개가 짙게 드리울수록, 시인은 자기의 의식을 자연으로 지향하여 우주적이제 시인은 죽음과 소멸이라는 어두운 파토스를 자연에 순응함으로써 초극할 수 있음을 깨닫게되었다. 여기서 그는 마침내 존재 초월의 궁극적 방식으로 영원과의 합일을 실현하고자 한다.수척한 물새 하나
생각에 잠겼는가
냇물을 굽어보는가
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는가
조으는가
-'풍장70'에서
시인의 의식은 영원을 지향하여 자아의 초월을 이루고자 한다. 이때의 자아는 방내(方內)도 방외(方外)도 아닌, 무방(無方)의 세계에 머무르기를 갈망한다. 무방, 그것은 곧 현실의 우울한 시간과공간을 완전히 일탈한 평온한 처소이다. 여기서는 단절된 현상계의 시간표가 아닌, 미분화된 삶의원형이 고요하게 숨쉬고 있다. 따라서 시인은 '물새'와 같이 깊은 삼매에 잡힌 듯 영원을 응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그의 의식 속에 냉혹한 시간의 인과율과 어두운 공간 체험이 사라지고, 새로운 삶의 지평이 조심스럽게 열린다.
이처럼 끊임없이 대상과의 심적 교류를 통해 존재의 근원으로 귀향하려는 황동규의 꿈은 신뢰할만하다. 그의 의식은 우주 속에 충만해 있는 만상의 궁극을 지향함으로써, 삶과 죽음의 내피(內皮)를 하나로 봉합하여 초월하고자 한다. 이 초극 앞에서 현상계의 모든 것은 영원의 한 그림자로 낮게 드리워진다. 허무도 불안도 없는 곳, 맹목적인 생존을 위한 일체의 움직임이 정지된 영원 안에서 시인은 죽음이 또 다른 존재의 한 방식임을 은밀히 깨닫는다. 이 때 그는 찾선 세상에서 훼손된 자아의 동일성을 온전히 회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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