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발굴…여성운동 대구·경북 1백년-대구YMCA 상

전세계 YWCA 역사상 순수한 토종 여성들의 자생력에 의해 조직이 생겨나고, 그 나라의 여성개화를 성공적으로 이끈 사례는 없었다.

이같은 사실은 김필례·유각경과 함께 한국YWCA의 개척기를 이끈 삼두마차 김활란의 자서전 '그 빛속의 작은 생명'이나 당시 국내 선교사였던 HA 로즈의 리포트 '한국에서의 40년'에서도 확인된다.

'한국의 젊은 여성들이 외국의 도움없이 Y를 창설해 이끌고 있다'는 선교사 로즈의 기록은 한국Y의 자생력을 입증하고도 남는다.

사실 이보다 2년전인 1920년, 미국Y는 한국에 Y설립을 권유했지만 일언지하에 퇴짜를 맞았다. '한국 Y는 일본Y 지회로 조직돼야한다'는 터무니없는 단서가 조선여성들의 자존심을 '확' 긁어놓았기 때문이었다.

1922년 6월22일 자생적인 모습으로 당당하게 고고성을 울린 한국Y의 맥을 이어받은 대구Y는1923년 4월21일 대구제일교회에서 창설돼 올해로 75주년, 지역 여성운동의 모체로 오늘날까지 건재하고 있다.

대구Y 창설을 위해 한국기독여성운동의 간판격인 김활란, 황에스터가 내려왔고, 신명여고 제1회졸업생 가운데 리더십이 강한 여성지도자 임성례(대구제일교회 집사)가 초대회장을 맡아 나라 잃은 절망 가운데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민족독립과 여성운동의 희망을 품은 씨앗을 뿌려나갔다.타임머신을 타고 대구YWCA가 창설될 당시로 되돌아가보자. 3·1운동 이후 비밀단체인 대구에서대한민국 애국부인회 사건이 발각되면서 사실상 여성정치운동 내지 독립운동은 불가능해졌다. 특히 3·1운동 이후 모든 사회단체는 일제의 삼엄한 감시와 탄압으로부터 거의 전멸 상태였다.그러나 일단 유사시에 독립운동단체로 활용할 수 있는 여성단체의 필요성이 절실해지면서 종교운동을 표방하고 나선 것이 바로 YWCA였다.

해방의 꿈을 안고 있는 조선여성들이 자력으로 만든 대구Y는 민족주의적인 색채가 강렬할 수밖에 없었다.

표면적으로는 종교운동, 내면적으로는 독립사상과 민족정신을 품은 기독교 여성들이 대구Y로 모여들었다. 이들은 일제의 탄압으로 1938년 폐쇄될때까지 회원 서로의 가슴속 깊이 말없는 맹세를묻어두고, 묵묵히 여성인권운동, 개몽운동부터 풀어나갔다.

대구Y가 펼친 여성운동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가정생활 계몽이다.

"…오늘날 우리 가정에서 주부 이하 안식구들이 과연 무엇을 합니까. 가지가지로 멸시와 일부림을 당하나 가장 억울한 것은 집안 식구들이 어른부터 아이까지 밥먹는 시간이 일정치 못해 아침부터 밤중까지 밥상 차리다가 세월을 보내고 마는 것이 아닙니까. 될 수 있는대로 일정한 시간에한 가족이 함께 모여 밥을 먹게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대구Y는 전국Y와 보조를 맞춰 가정생활에서 쓸모없는 수고를 덜자는 캠페인을 펼쳤다. 가정계몽운동과 함께 축첩의 폐지, 공창제도의 폐지, 기독교 신앙교육, 국산품 장려운동, 금주·금연운동,어린이 부녀자에 대한 야학 실시 등을 광범위하게 취급했다.

20~30년대 우리 농촌 부녀자들의 절대다수는 까막눈. 자연히 문맹퇴치작업이 대구YWCA의 큰 과업으로 자리매김됐다. 극히 원시적인 생활속에 버려져있던 농촌부녀자에 한글깨치기 작업에 이어대구Y는 곳곳에 야학을 설치·운영하였다. 필요에 따라서는 시시로 강습회를 열어 교회봉사·가정관리·유아교육법 등 기초적인 구술교육을 실시했다.

대구Y의 초창기를 이끈 임성례씨는 1923년~1925년(초대), 1932~1938년(제4대) 등 약10년간회장으로 근무하면서 여성교육을 위한 명도학원을 경영하였으며, 기독교적인 문화사업과 생활개선운동 및 자선사업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제2대 추애경(1926~1929), 제3대 이혜경씨(1930~1931)가 바통을 이으며, 일제탄압으로 폐쇄될때까지 매년 '힘쓰자' '분발하자'등의 주제를 정해 여성활동의 기초를 다져나갔고, 신명여고 출신의이선애는 여름전국모임의 연합위원으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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