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새둥지 만들기

IMF 시대, 온 나라가 힘들고 가정이 부서진다.

나라도 구제 못한다는 가난을 가족간의 끈끈한 정과 희생정신으로 이겨내던 우리네 가정들이 IMF 태풍에 쓰러지고 흩어지는 이때, 갑자기 휘몰아친 부도 사태에도 쉽게 삶을 포기하지 않는 엄마·아빠의 가없는 사랑과 그 부모를 믿고 따르는 아들·딸의 신뢰가 한마음이돼 재기일로를 걷고 있는 황일선씨(53·대구시 중구 삼덕동)네.

가정의 달에 되짚어보는 황씨네의 부도와 재기 일지(日誌)는 IMF 시대에 예외없이 불어닥칠 수 있는 '삶의 전쟁터'에서 무엇보다 소중한 가족애가 우리에게 희망을 던져주는 감동드라마를 연출하고 있다.

토요일 오후인 지난 1일, 대학에 재진학하기 위해 새벽부터 학원에 다녀온 외동딸 수현씨(24)가 팔을 걷어붙이고 주방으로 향한다. 이화여대를 다니다 호주로 유학가서 치대생활을하던 수현씨에게 아빠 조희신씨(57·성화목재 대표이사)의 부도소식이 날아든 것은 지난 음력설 전후.

수현씨는 당장 학업을 때려치우고 집으로 돌아왔다. 자금회수가 안돼 받을 돈이 많은데도,채권액의 4분의1이 안되는 자금을 결제하지 못해 아빠 회사가 졸지에 넘어갔다. 막판에 이모·외삼촌까지 돈을 보태 부도를 막아보려 했지만 불가항력이었다. 일은 터지고 말았다.법없이도 살 남편이 부도로 넘어지자 아내 황일선씨는 며칠간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부도가 나기전에 살 궁리를 해라"는 권유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남의 눈에 눈물흘리게 하면 내눈에는 피눈물이 난다"는 신조를 갖고 결코 남에게 해끼치는 일이 없이 살아온 황씨네는 끝까지 회사를 살리려고만 했지, 눈꼽만큼도 고의적인 부도를 염두에 두지는않았다.

하지만 일은 터졌다. '애달볶달', 앓아누울 여유도 없었다. 남편을 위로하려면 강해져야만 했다. 빚진 사람들에게 진솔한 마음이라도 전하려고 결혼생활 30년동안 모았던 패물, 심지어혼수반지까지 미련없이 빼주었다.

"저당잡힌 집이지만 아직 팔리지 않았으니 밥장사라도 해요"

언제 그런 배포를 배웠는지 딸의 격려에 힘을 얻은 황씨는 살던 집에 '이조식당' 간판을 내걸었다. 개업한지 한달째. 아직 장사의 틀이 채 잡히기도 전에 화초부인처럼 곱디곱던 손바닥부터 갈라터졌지만 생활비라도 건질 수 있어서 참 다행이었다.

내로라하던 '사모님'에서 창졸간에 주방장으로 전락한 황씨를 찾은 지인들이 "우야노" 소리만 내뱉어도 눈물이 앞을 가리던 것도 잠시뿐, "사태 해결에 열심인 남편이 반드시 일어설것"이라는 희망을 간직한 황씨는 쉽사리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

"억울하다"며 다 때려죽인다고 야구방망이를 들고 나서던 둘째 아들 국남씨(서울대 대학원재학중)에게는 아버지의 부도 과정을 있는대로 얘기하지도 못한다. 경북대의대를 졸업하고오는 10일부터 울산 동강병원에 인턴으로 내려갈 큰 아들 민수씨(29)의 혼사에 대해서도 "제 마음에 드는 아가씨가 분명히 나타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못할짓 하면서 비굴하게 잘 살고 싶진 않았다"고 털어놓는 황씨는 학원공부가 끝나면 생활과의 늦전쟁을 치르느라 홍역을 앓는 엄마를 위해 피곤한 내색도 없이 일손을 걷어붙이는딸을 친구삼아 오늘도 희망을 심고 있다.

〈崔美和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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