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귀뚜라미 소리가 내려앉은 어두움의 그림자 사이로 파고든다. 아직도 불볕더위가 밝은 대낮을 지루하게 만들건만 분명 9월은 온 것인가 보다. 이 작은 마을에 같이 누워 호흡한지 이제 두달째! 온통 포도냄새로 가득한 이곳, 낮이면 도로를 활보하는 경운기 소리가 정겨운 이곳은 나의도피처였던 셈이다.
1998년 봄, 난데없이 불어닥친 IMF 태풍에 휘말려 남편의 사업이 산산조각 나 버렸다. 매스컴에서 IMF로 인한 갖가지 고통을 보여줬어도 남편의 사업은 IMF라는 태풍의 눈 안에 자리해 고요할거라고 기대했건만 결국 나 또한 IMF에 난파돼 우왕좌왕하는 난민이 돼버렸다.그래도 아침은 찾아왔다. 남편은 집에 있었다. 하루종일 남편, 아이와 수다떨고 TV보는 것이 낙이었고 매일 밤만 계속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적금 통장 하나가 해약됐다. 신이 나서 부었던 적금이었건만 단 몇초만에 통장엔 더 이상 쓸 수없다는 표시로 여러개의 구멍이 뚫려졌다. 곧이어 승용차가 팔렸다. 많이 타보지 못한 걸 후회하면서 아쉬운 마음으로 승용차를 떠나보냈다. 남편이 집에 있으니 왜그리 돈은 잘 나가는지. 또 하나의 적금이 해약됐다. 여전히 남편은 아침부터 밤까지 내 곁에만 있었고 올 4월에 태어난 둘째녀석의 뒤치다꺼리가 날카로워진 내 신경을 더욱 건드렸다.
남편은 아무말이 없었다. 어떻게 살 것인지, 무엇부터 해야할건지 도무지 입을 열지 않는다. 할수 없이 내가 나서야 했다. 남편에게 보따리 장사를 하자고 했다. 처음엔 체인점 형태의 제과점을하려 했으나 앞으로의 전망에 대해 확실한 보장이 없는 일에 큰 돈을 투자할 수 없었다.고민끝에 자본이 적게 들면서 이익이 괜찮을 것 같은 보따리 장사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남편은반대했다. 2개월된 아가가 딸린 몸이었고 아직 제대로 몸조리도 못한 터였으니 반대는 당연했다.그러나 나는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통장의 돈이 바닥날 지경이었고 갚아야 할 돈은 산더미같은데 그냥 앉아있을 수는 없었다. 하루하루를 세월만 먹고 사는 어리석은 짓이 용납될 상황이 아니었다.
나는 끝까지 우겼고 하루에도 몇번씩 부부싸움을 했다. 결국 내가 이겼다. 다행히 우리에겐 트럭이 한 대 남아 있었다. 궁리 끝에 좀더 물건을 싸게 떼려면 서울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밤에남대문 시장을 향해 떠났다.
큰 아이는 친정에 맡겨둔채 2개월 된 둘째놈과 덜컹대는 트럭을 타고 4시간여의 긴 시간을 쉬지않고 달려 도착한 남대문은 새벽이 아니라 대낮같았다. 어리둥절한 가운데 남편, 핏덩이와 함께남대문을 헤매기 시작했다. 더운 밤공기와 내려앉은 밤이슬이 기분을 나쁘게 만들었지만 내일이면 돈을 벌 수 있다는 희망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우선 속옷 도매상을 찾았다. 장사라고는 처음 해보는터라 혹 초보 표시가 나 바가지를 쓸까 조마조마해 하며 속옷을 고르는데 갑자기 아가가 울기 시작했다. 쿵쿵대는 음악소리와 북적대는 사람들의 체온때문인지 아가는 아무리 달래도 울음을 그칠줄 몰랐다. 눈물이 나려 했지만 그래도 돌아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겨우겨우 속옷을 사고난 후 아가를 달래며 머리핀 도매상을 찾았다. 물건이 많아 보이는 가게에들러 이번에는 장사를 처음 한다는 것을 밝히고 주인에게 잘 팔릴만한 물건을 골라달라고 부탁했다. 겨우 진정됐던 아가는 머리가 흠뻑 젖을만큼 땀을 흘리며 또다시 울어젖혔다. 차에서 타 온우유가 어느새 다 식어있었고 아가는 차가운 우유를 뱉아 내기만 했다. '어린게 무슨 죄가 많아이 고생을 하나' 하는 생각에 울컥울컥 서글픔이 올라왔다.
머리핀을 골라주는 도매상 주인옆에서 아가와 씨름하다 새벽4시쯤에야 다시 트럭을 타고 대구를향해 달렸다. 좁은 트럭 앞좌석은 마음놓고 발을 뻗칠 수도 없었고 조금남은 뒷공간에는 짐을 실었기에 의자를 젖힐 수도 없었다. 아가 때문에 에어컨도 마음대로 틀 수 없는 탓에 온몸이 아파왔다. 차에 쪼그리고 앉아 아가에게 우유를 먹여가며 휴게소에서 잠깐 눈을 붙이고는 다시 달렸다.
꼬박 하루를 그렇게 보낸후 집에 도착해 조금 쉬다가 막바로 장사를 시작했다. 우선 다방과 식당같은 곳이 돈을 만지기 쉬울 것 같아 소도시의 다방부터 찾아갔다. 아가와 남편은 차에서 기다리고 나는 샘플로 내놓은 몇 종류의 속옷과 머리핀을 쇼핑백에 넣어가지고 다방에 들어갔다. 속으로 어떤 말부터 꺼내야 할는지 생각하면서.... "저어기 속옷과 머리핀 구경 좀 하세요" 하며 들어가는데 왜그리 떨리고 부끄러운지 등줄기에선 땀이 흘러 내렸다. 다행히 20대인 내가 그런 장사를 하는 것이 안쓰러웠던지 아가씨들이 물건을 잘 사줬다.
첫째날의 수입이 괜찮아 이튿날부터는 일찌감치 출발했다. 점심값이 아까워 집에서 대충 밥을 싸가지고서 지도책을 보며 작은 동네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6월의 햇살이 트럭으로 내리쬐니감당할 수 없을만큼 뜨거웠지만 축축하게 젖어오는 옷을 입고서도 곧 일어설 수 있다는 희망하나로 웃으면서 돌아다녔다. 다니다 아가가 응가를 하면 그냥 가까운 시냇물에 엉덩이를 씻겼다. 보통 오후3시가 넘은 시간이라야 나무그늘 아래에 자리를 깔고 집에서 가지고 온 밥이랑 김치에 풋고추와 된장을 곁들여 점심을 먹었다.
어떤 날은 주인없는 자두밭에서 자두를 서리해 후식으로 먹기도 하고.... 아직 20대인 나. 이제까지 고생이라고는 몰랐던 내가 이렇게 어린 것을 달고 찬밥에 풋고추 먹고 서리해 온 자두에 감격해 하고 있으니 기가 막힐 지경이었지만 그래도 살아가야할 긴 날들을 포기할 순 없었다.열심히 이곳저곳 다니다보면 매정스레 차가운 대접을 하는 곳도 있었고 희희덕거리며 농담을 건네는 남자들도 있어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문득문득 들기도 했다. 그러나 하루하루 통장속에서불어가는 숫자들이 그런 어려움을 잊게 해줬다.
그러나 세상은 참 야비했다. 남대문 시장에서 떼온 머리핀이 일반 머리핀보다 가격이 배나 비싼것이 아닌가! 속옷은 그런대로 팔렸지만 머리핀은 단 하나도 팔리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도 비싼것 같은데 하물며 소비자의 입장은 어떻겠는가? "머리핀 장사를 처음하니 도와달라"고 부탁했던내가 바보였다. 백만원이나 주고 떼온 물건이 겨우 조그만 쇼핑백으로 하나였으니 얼마나 바가지를 썼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는 수 없이 남편이 남대문에 있는 도매상에 전화를 해 "20만원손해볼테니 반품을 해달라"고 부탁을 했으나 거절당하고 말았다. 본전보다 싸게 팔 수는 없었기에 그날부터 머리핀을 본전에 팔기로 했다. 그러나 도매값을 불러도 아무도 사지 않았다. 어쩔 수없이 머리핀은 포기한채 속옷만 열심히 팔았다. 창피하던 마음도 차차 덜했고 열심히만 하면 빨리 돈을 모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다고 했던가? 남편과 자꾸만 말다툼이 일어났다. 내가 돈을 버는 탓인지 나도 모르게 남편이 작게만 보이기 시작했고 남편이 하는 말은 모두 잔소리로만 들렸다. 그리고 열심히 하려는 나에게 불만을 내비치는 남편이 야속하기만 했다.
그런 와중에도 하루가 번개처럼 지나갔다. 땅거미 질 무렵, 혹은 하늘에 붉은 노을이 곱게 꽃피어있는 무렵에 집으로 돌아오는 우리들은 전쟁을 마치고 돌아오는 군인과도 같았다. 남편은 남편대로 운전하느라 지쳐있었고 나는 나대로 발이 부르터져라 쫓아다녔으니 지칠 수밖에....아가는 잘 커왔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아가의 목에 땀띠가 나기 시작하더니 갈수록 심해져 못볼 지경이 돼버렸다. 하루종일 좁은 트럭에 누워 그 따가운 햇살을 받고 있으니 땀띠가 나는 건당연했고 제대로 씻길 시간조차 없으니 나을 수가 없었다. 정말 가슴이 아팠다. 다른 아가들은 2개월이면 침대에 편안히 누워만 있을텐데. 못난 부모 만나 저토록 심한 상처를 안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어린 것이 불쌍해 도저히 이 짓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나는 장사를 포기했다. 돈보다는자식이 소중했으니까....
그리고 얼마후 이사를 결심했다. 마땅한 벌이도 없는데 도시에 사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에게 시골로 가자고 했다. 농사를 지을 줄 모르지만 남편에겐 기술이 있으니 자리만 잡으면 입에 풀칠은 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이번엔 살 곳을 찾기 위해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무작정 차를 타고 우리의 보금자리를 찾아다녔다. 생활정보지 서너개를 항상 차에 싣고서 표시를 해가며 헐값에 내놓은 집을찾아다니기도 하고 가구수가 많은 동네를 찾아다니기도 했다. 그렇게 며칠을 헤매다 찾은 동네가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이다. 작은 동네지만 교통이 편리할 것 같았고 고층 아파트와 유통센터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인구도 꽤 될 것 같았다. 더욱이 이곳엔 남편의 기술을 내건 간판이 보이질않았다.
랜만에 마음의 평화가 찾아들기 시작했다. 편안한 마음으로 이제 남편과 함께 점포를 꾸며나갔다.생각보다 돈이 많이 들었으나 그건 더 큰 성과를 얻기위한 투자이니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런 중에 이웃어른들이 낚시방도 겸업해 보라고 권해왔다. 이곳엔 저수지가 많아 낚시방을하면 먹고 사는데 큰 어려움은 없을 거라며 동정어린 마음으로 권하기에 낚시방을 차렸다.처음 하는 낯선 장사인지라 무엇부터 해야할지 어떻게 꾸며야할지 허점투성이었지만 시골의 인심은 죽을 각오로 들어온 이방인을 포근히 감싸줬다. 낚시에 관심있는 분들의 조언에 따라 하나, 둘배워나갔더니 그런대로 손님이 모여들었다.
나는 또다시 신이 나기 시작했다. 아침일찍 남편과 아이를 남겨둔 채 낚시방으로 나와 문을 열면아직 덜 깨인 아침공기가 폐속으로 산소를 가득 품고 스며든다. 매일매일이 상쾌한 아침이다. 그렇게 문을 열고 있다가 남편과 아가가 나오면 다시 아가를 업고 집으로 돌아간다. 집에서 아침밥을 준비해놓고 기저귀가방 챙겨 낚시방으로 다시 나오면 이번엔 남편이 돌아가 밥을 먹고 나온다. 그래서 나의 아침밥은 점심과 겸해 먹는다.
나의 하루는 짧다. 이 시대의 누구나가 짧은 하루하루를 빼곡이 채우느라 숨돌릴 겨를 없이 살지만 아가와 씨름하며 낚시방을 오가는 나의 하루 또한 짧기만 하다. 아가가 일회용 기저귀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일거리도 많고 창 많은 한옥집이라 먼지도 많이 날아들어 하루종일 일만 해도모자란다. 음악을 들을 시간도 책을 읽을 시간도 없다. 그러다가 남편에게 일감이 들어와 외출이라도 하게 되면 아가와 함께 제대로 누울 자리도 없는 가게에 딸린 작은 방에서 가게를 지켜야한다. 그래서 아직 우리 아가는 땀띠로 흉터진 목에 새로 돋아난 빨간 땀띠를 안고 산다.대형차들이 많이 다니는 길목에 위치한 탓에 하루에도 몇번씩 차소리에 놀라 화들짝 놀라는 아가를 안고 어서 돈모아 가계계약기한 끝나고 나면 조금 더 넓은 곳으로 이사할 꿈을 꿔본다. 이왕이면 취사 가능한 가게로 이사를 가 등에 아가업고 국냄비 나르는 일이 없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그런 꿈을 꿀 수 있기에 난 지금 행복한 미소를 지을 수 있다.
이 세상엔 영원한 어둠은 없음을 이 거대한 IMF는 내게 가르쳐 줬다. 어두움이 있기에 태양이더욱 찬란함도 새삼 느끼게 해줬다. 이곳엔 내 꿈이 있다. 내 꿈을 펼 수 있는 밭도 있다. 모든것을 잃어 버렸어도 끝까지 놓치지 않을 '꿈'이라는 밧줄 하나가 힘든 일상을 잊게 해준다.넉넉한 이웃의 인심은 그 꿈과 더불어 내 삶을 살맛나게 해준다. 닷새마다 서는 장날이 필요 없을만큼 이웃들은 먹거리를 나눠 준다. 포도, 수박, 오이, 고추.... 쉴새 없이 신선한 먹거리들이 아무런 대가없이 냉장고에 들어찬다. 문을 잠그지 않고 집을 비우기에 누가 갖다 놓은건지도 잘 모를 갖가지 먹거리들이 출입문 앞을 지키고 있곤 한다. IMF로 모든 것이 쪼그라들어 있어도 이시골의 인심은 풍성하기만 하다.
어떻게 이 아름다운 마음들을 갚아나가야 할지 모르겠다. 산다는 것은 좋은 것이다. 모든 걸 잃더라도 꿈만 간직한다면 세상사의 무게는 가벼워 온다.
나는 '벅'이라는 신세대 가수들의 '맨발의 청춘'이라는 노래를 좋아한다. 가사가 좋다. "가진 것없다지만 난 꿈이 있어~"
그래, 모든 걸 잃어 벌거벗은 몸이지만 내겐 꿈이 있으니 난 행복한거야. 나또한 지금은 맨발이지만 난 아직 청춘이기에 이제 출발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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