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 보면 그래도 잃은 것보단 얻은게 많은 세월이었다.
책임감 없고 원래 가정적이지 못했던 남편은 8년전 개인택시 면허취득과 함께 알고 지내던 여자애랑 영영 자취를 감춰버렸다. 그 치욕스럽고 참담한 상황들을 현실로 받아들이기까진 그 후로도많은 날들이 흘러야만 했었다.
20개월 분할로 산 차의 할부금 영수증은 어김없이 집으로 배달됐다.
초등학교 1,2학년인 어린 남매를 봐서라도 꼭 돌아오리라는 한가닥 기다림도 있었고 독촉에 시달리는게 무서워 남은 돈 모두를 꼬박꼬박 차 할부금으로 써 버린 어리석음을 범했기에 급기야 끼니조차 잇기 어려운 지경에 처하고 말았다.
이웃들은 분노했고 무슨 미련이 남아 그대로 두느냐는 등 말들이 많았다.
하지만 먼 훗날 자식들을 위해, 아니면 더 이상 비참해지기 싫어 내가 취할 수 있는 법적인 모든권리(간통죄, 이혼청구소송 등)를 포기한채 물만 먹여줘도 좋다는 두 아이 손을 잡고 월세방 하나를 얻어 새 삶을 시작했다.
파출부, 식당일 등 막노동을 하면서 처음 해보는 남의 집 일이라 힘들고 서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잠시도 쉬지 않는 열성을 보였기에 많은 업주들이 불러주었고 덕분에 모자람 없이 아이들챙기며 차츰차츰 옛 일을 잊어갔다.
유년기를 온통 두려움으로 보낸 내 아이들. 밤 10시가 넘어서야 끝나는 식당일을 할 때면 번번이마지막 버스를 놓치기 일쑤였다. 집에 전화가 없었기에 연락도 못한 채 택시비가 아까워 먹을 것을 사들고 먼 길을 걸어올라치면 엄마마저 도망가버렸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깜깜한 골목 양쪽어귀에 붙어서서 서럽게 울고 있던 내 새끼들. 껌종이 속에 들어있던 네잎 클로버를 항상 간직한채....
아무튼 날이 갈수록 아이들은 맑고 밝게 잘 자라줬다.
우리는 허름하고 낡았지만 전세방을 얻고 어느 돌아가신 분의 냉장고며 가전제품을 얻어다 감로수처럼 달디단 냉물도 마시면서 작은 행복에 들떠 있었다.
유달리 총명했던 딸애의 초등학교 졸업식날.
팸플릿에 이름이 박히고 몇번이나 졸업생 대표로 단상에 올라가 장학금이며 상을 받을 땐 그 동안의 설움이 한순간 다 녹아내릴만큼 감동적이었다.
자신 있었다. 열심히해서 중.고등학교를 내 힘으로 졸업시키면 어릴 때 들어둔 교육보험이 있기에대학도 무난히 시켜내리라 자신했다.
그러나 호사다마랄까? 약한 체력에 힘들면 남모르게 상습적으로 진통제를 먹고 견딘 탓인지 어느날부턴가 건강이 나빠졌다. 결국 심한 빈혈에 시달리다 이층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되는 불운을 겪고 말았다.
의료보험도 처음부터 완전 체납된 상태였기에 병원 치료는 엄두도 못낸 채 약이나 어른들이 가르쳐준 조약으로 먹고 바르고 붙이면서 조금씩 움직이다 몇 달 후 보험회사엘 찾아갔다.유독 교육보험만은 명의변경이 되지 않고 본인이 아니면 해약도 할 수 없다기에 어쩔 수 없이 그대로 두었는데.... 세상에 이럴 수는 없다. 나를 향한 그 어떤 행위도 참을 수가 있었지만 버린 자식에 대한 죄의식은커녕 마지막 보루처럼 믿고 있던 자식의 학비마저 잘라 해약해 가버린 그들의파렴치함을 도대체 어떤 말로 표현해야할까? 인간에의 혐오감, 삶의 회의. 억지로 힘을 내어 버티며 살아왔던 지난 날들이 허망했으며 나는 심한 우울증에 빠져 들었다.
'자동차등록소'를 찾아갔다. 차적을 조회한 결과 개인 또는 은행에 이미 여러 군데나 저당설정이되어 있었고 거주지를 확인한 결과 주민등록도 이미 말소된 상태였다. '왜 그리 되었나' 처자식버리고 좋은 사람 만나 의기양양하게 달아났으면 돈이라도 많이 벌어야지. 잘 되어 있어도 속이상했겠지만 잘못된 모습도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중학생이 된 딸애는 즐거운 모습으로 학교생활에 충실했다.
공납금과 입학금은 졸업 때 받은 장학금으로 해결했지만 계속 필요한 학자금과 또 후년이면 아들마저 중학생이 될 걸 생각하자 앞이 아득했다.
부실한 몸을 숨기며 일터를 찾았지만 나는 번번이 쫓겨났다. 그 사실을 아이들이나 이웃이 알까봐 초조해하며 용기를 내어 동사무소를 찾아 학비라도 보조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달라고 탄원했다. 그러나 일은 생각처럼 간단하지 않았다.
'모자가정'이라 가능하리라 믿었는데 이혼이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고 컴퓨터조회결과 개인택시라는 사업자등록증이 있어 미과세 증명서를 뗄 수 없다는 이유였다. 충분히 알고 있지만 서류상재산이 있어 어쩔 수 없다는 얘기였다.
원망스러웠다. 세상도, 사람들도. 이후 오랫동안 몸의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다.목과 가슴이 아무래도 이상하다 싶어 살금살금 만져보던 나는 작게 만져지는 멍울을 발견하곤 소스라치게 놀랐다. '암'이라고 생각했다. 매일매일 없어지지 않는 혹을 만지고 또 만지면서 절망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불행을 감당하지 못해 팔순 노모를 애타게 부르고 하느님을 찾으며 살려달라고 매달렸다.
내 지은 죄의 뿌리까지 뉘우치면서 눈물, 콧물을 흘리며 빌고 또 빌었다.
가엾은 아이들을 위해서 좀더 그들곁에 있게 해 달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지치고 힘들 때면 잠자는 듯 그대로 가버리고 싶다는 생각도 더러 했었다.
하지만 막상 닥친 엄청난 현실앞에서 도대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몰라 허둥대며 남겨질 아이들과 망연자실할 어머니의 얼굴만을 계속 떠올렸다.
혼자 쭈그리고 앉아 서러워할 내 생일날이면 딸의 불행이 안쓰러워 찹쌀 한웅큼, 미역 한줄, 쌈짓돈 얼마를 꼭꼭 챙겨주시던 내 어머니.
어린 시절, 기억 속의 아버지는 늘 밖에서만 사셨다. 굶주린 여섯 남매를 품어 안은채 일본식 다다미가 깔린 낡은 이층방 창문너머로 언제나 아버지가 오시기를 초조하게 기다리던 어머니 모습.나는 못된 아이였다. 가난과 굶주림. 유독 공부만은 잘해 우등생이었던 학창시절 내내 도시락은물론 작은 코바늘 하나, 옥양목에 검은 띠를 두른 그 꿈같은 체육복 하나도 마련하지 못했다. 그때문에 준비물이 필요한 수업시간이 닥쳐 올수록 공포감에 질려 작은 가슴을 콩닥이며 얼마나 어머니의 무능함을 경멸했던가. 나는 절대 어머니처럼 그렇게 살지 않으리라 다짐했다.그러나 세월이 흐른 지금, 한치의 오차도 없이 같은 길을 걸어가고 있는 나는 운명을 절감하며제발 내 딸만은 같은 길을 걷지않게 하려고 걸음걸음 흔적을 지우려고 애썼는데....어머니! 어차피 같은 운명이라면 팔순 내내 건강하시고 장수하시는 그 생명력마저 제발 닮게 하소서. 혼란속에서도 나는 점점 이성을 되찾아갔다. 운명이라면 받아들이자. 설치고 발악한들, 왜하필 나냐고 소리친들 무슨 소용 있으랴.
어쩌면 나는 비겁한지도 모른다. 피흘려 투쟁하지 않고 어려운 길 닥칠때마다 차라리 포기하고체념하며 피하려고만 하는....
목숨처럼 사랑한다는 말만 할 뿐 살아서는 눈에 밟혀 못버리는 아이들을 이제 죽음으로 버리려하고 있다. 나 혼자 편해지려고.
암보험 하나 들어두지 않은걸 뼈저리게 후회하면서 죽든 살든 부딪혀보리라 생각하며 결과가 두려워 몇번이나 되돌아섰던 병원을 찾았는데. 그곳에서 나는 너무나도 다른 세상을 볼 수 있었다.'암'이 아니라 근육이 너무 망가져 어혈이 막힌 거라고 또한 인후염이 너무 심해 오랫동안 치료를 받아야 하겠다.
'오, 하느님! 지지리도 복 없음을 한탄했습니다. 다른 이의 복그릇은 항아리같고 내 그릇은 접시같아서 아예 쓸어담을 생각조차 않은채 세상을 원망하고 사람들을 기피하며 이기적이고 부정적인삶을 살았습니다. 찾아야할 희망은 버려두고 버려야할 절망만을 껴안은채. 거듭 태어난 삶의 축복앞에서 작게만 보였던 그 복그릇이 얼마나 질기고 단단한 것인가를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진정 고맙습니다'
주체할 수 없는 감동과 희열로 달랑 밥 한그릇에 짠지 하나를 먹으면서도 우리는 입이 귀에 걸리도록 웃으면서 그렇게, 그렇게 행복했다.
서른다섯, 여섯. 늦은 나이에 낳은 내 아이들은 결손가정의 아이답지 않게 밝고 당당한 모범생으로 자라 주었으며 아들까지 이젠 중학생이 되었다.
는 것을 진정 감사할 줄 아는 착한 아이들은 봉사상, 효행상 등 숱한 상을 받으며 장학생으로 선발되는 기쁨도 누렸다.
불어닥친 IMF 한파로 실업자가 급증하면서 여러 가지 형태의 가슴 아픈 사고 소식들을 접했을때 오히려 나는 떠나간 남편에게 감사한 마음마저 들었다.
아이들 손을 잡고 새삶을 시작했을 때 우리들의 IMF는 이미 시작됐다.
사고력이 형성되기전 어린 시절에 위기감을 겪어버린 아이들은 사춘기마저 그때 다 치뤄 버렸는지 마냥 방글방글 밝기만 하다.
아마 지금 그 일을 겪는다면 어려운 시대와 맞물려 나와 내 아이들은 어떻게 대처했을 것이며 또한 아이들의 무너짐은 어떻게 잡을 수가 있었을까?
이미 어른들의 인연은 끝났지만 언제, 어디서, 누구와 살든 건강하게 잘 살아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그는 부인할 수 없는 내 자식들의 아버지니까.
내 기존의 틀에 맞춰 불신했던 남자들의 재인식. 여성가장이 되어 사회생활을 하면서 가족들을위해 평생을 몸바쳐 일하는 남자들의 힘든 삶을 알았다.
눈뜨면 일터로 또 집으로 움직이느라 틈새조차 없이 지친 영혼들의 위대함에 스스로 존경하는 마음까지 갖게 됐다. 열심히 가족들을 위해 살아온 분들이 비록 지금 실직의 아픔을 겪고 있더라도참고 기다리며 주변의 진정 불행한 삶들을 바라보며 용기를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다.지난번 수해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 물속에서 답답해서 숨이 막혀 어떠했느냐며 울부짖던 사람,지체부자유자, 병마로 혹은 사고로 어쩔 수 없이 죽어가는 많은 사람들. 우린 그래도 이렇게 살아있고 걸을 수 있는 두 다리와 생각할 수 있는 머리, 일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기에 참고 기다리면 반드시 좋은 결과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삶' 그 자체가 실직일 수밖에 없는 여성 가장들에게도 희소식이 왔다.
고용보험 적용자에 한해서만 실시하던 실직자 재취업 훈련이 일용직 단순노동을 하며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드디어 기회가 온 것이다.
힘없고 못났기에 소외되고 있는 것같아 서운했지만 세심하게 챙겨주신 정부 당국에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많은 분들이 참가한 가운데 재취업 훈련의 취지를 들으며 재취업 훈련을 마지막 반전의 기회로삼아 혼신을 다해 열심히 배우리라 다짐했다.
선택한 과목은 한식 조리. 비록 나이는 들었지만 어릴 때 공부를 곧잘 했던 머리를 되살려 꼭 기능사 자격증을 따리라. 설령 취업이 되지 않는다해도 살아가면서 꼭 필요한 것이고 파출부 일을하더라도 보람차고 당당해질 수 있을테니까.
첫날 쭈뼛하며 얼굴을 가린채 들어서는 여성가장들을 바라보면서 피식 웃음이 났다. 결코 부끄러워 할 이유가 없다. 우린 남편없이 살아가는 불쌍한 존재가 아니라 아버지 없는 아이들을 훌륭하게 키워가는 전사들이니까.
아, 이제사 어렴풋이 세상이 보이는 것 같다. 지난 7, 8년의 세월은 작은 것을 잃고 오히려 큰 것을 얻은 그런 세월이었다. 절망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으며 강인함을 배우는....생.로.병.사, 네 글자로 압축된 큰 의미속에 양념처럼 희.노.애.락을 섞어 놓은 그 여덟글자에 세상 모든 사람들의 일생이 들어 있는 것을....
감사하며 살리라. '궁'하면 '통'하고 '통'하면 '달'한다는 말처럼 절대 좌절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살리라. 열심히 배우고 남는 시간 가엾게 죽어가고 있는 보호자 없는 암환자들을 위해서 그들의목덜미며 온 몸에 서러움처럼 묻어있는 땟물을 사랑으로 닦아주는 그런 삶을 살리라.조금은 덜 후회하고 떠날 수 있는 내 삶의 마지막 날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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