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한국영화 어제와 오늘-(9)초창기 향토 극장

대구지역 최초의 극장은 1910년대 중반에 일본인 나카무라(中村熹一)가 세운 '대구좌(大邱座) 로기록돼있다. '대구연극사 를 펴낸 연극인 이필동씨는 "대구좌가 지역 최초의 옥내극장이었으나 극장시설을 거의 갖추지 못한 공연장으로 주로 일본인을 위한 연극, 노래, 춤 등이 공연됐다"고 말했다.

영화상영이 가능한 시설을 갖춘 본격적인 극장들은 1920년대를 전후해 세워졌다. 1920년 전당포영업자들의 모임인 '일심회 와 나카무라 등이 현 대구극장 부지에 조선인을 위한 극장으로 '조선관 을 신설하자 '대구좌 는 자연히 문을 닫게 됐다. '조선관 도 1922년 조선인들만의 발기로 '대구극장 을 세우기로 함에 따라 2년만에 문을 닫는다.

지금의 대구극장 맞은편 상업은행 옆길을 50m쯤 들어간 향촌동에 세워진 '대경관(大鏡館) 은 '호락관(好樂館) 으로 이름을 바꿔 '만경관 '영락관(榮樂館·현 자유극장) '신흥관(新興館)·현 송죽극장) 등과 함께 영업을 하다 '키네마(구 한일극장) 가 생긴후 건물의 노후와 경영 부진으로문을 닫게 된다. 당시 '영락관 '신흥관 등은 일본인이 경영했으나, '만경관 은 조선인에 의해운영됐다.

당시 극장내 객석은 지금처럼 의자가 놓여있지 않고 다다미가 깔려있었다. 좌석도 남자와 여자자리로 구분돼있었는데 부인석에 일본인들이 '어부인석(御婦人席) 이라고 써붙여 중국인들의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다. 일본말로는 '어(御) 자가 존경을 뜻하는 높임말이지만, 한문으로 풀이하면'어부인석 은 '부인을 자기 마음대로 하는 자리 라는 뜻이 되기 때문.

겨울철이면 방석과 화롯불을 돈을 받고 빌려줬는데 방석은 5전, 화롯불은 10전이었다고 한다. 당시 관객들은 극장의 명물인 무성영화를 해설하는 변사가 엉터리소리를 하거나 무대극이 재미없을때 방석을 집어던지며 집어치우라고 고함을 지르기도 했다.

당시 극장들은 일종의 종합연예오락기관으로 영화, 연극, 기생들의 창·무용 공연 등은 물론이고심지어 씨름대회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흥행선전은 요즘의 광고 포스터 대신 큰 깃발을 앞세우고악대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거리를 누비고 남녀배우가 인력거를 타고 선전행렬을 뒤따라 다녔다.배우들의 인기는 대단해서 '호락관 은 무대인사를 하러 나온 나운규를 보려고 들이닥친 인파로인해 목조로 된 2층이 무너지는 불상사가 생기기도 했다. 변사들의 인기도 하늘을 찌를 정도로극장 문앞엔 언제나 기생들이 보낸 인력거가 대기해있다가 극장밖을 나서는 변사들을 낚아채듯태우고 갔다고 작고한 이규환 감독은 '영화 60년 인생을 정리한 글에서 회고하고 있다.〈金英修기자〉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