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대도시들의 파괴적 흡입력이다. 희생물은 어차피 농촌지역. 이미 인구의 절반 이상을 뺏기기도 했지만, 칠곡군은 지역 결속력까지 위협 받고 있었다. 불과 40㎞ 거리에 포진한 대구와 구미라는 거대한 도시들이 주범.
군내에서 가장 큰 시장이었다는 동명면 5일장부터 찾았다. 결과는 '역시'였다. "10여년 전만 해도 우시장이 왕성했고, 본바닥과 가산면은 물론 멀리 인동(구미)에서까지도 장보러 사람들이 몰렸지요. 하지만 이젠 장이 서도 아침에나 잠깐 사람 구경할 뿐입니다" 장터에서 만난 김일수(64)씨는 동명장을 "제대로 된 시골장이라 부를 수도 없는 지경"이라고 단언했다. 81년도에 대구시에 편입 당한 인접 칠곡읍 지역에 아파트 단지와 대형 할인점이 잇따라 들어선 뒤 나타난 결과.
하지만 장에서 만난 누구에게서도 옛시절 향수 얘기는 들을 수 없었다. 인접 대도시를 이용할 수 있는 편리함이 더 좋다는 것. "민원 서류 떼러 가는 것 빼고는 군청 소재지(왜관읍)에 갈 일이 없어요. 조그만 물건 하나를 살 때도 대구에 나갑니다". 한상복(48) 면장은 "동명이 행정 구역 상으로만 칠곡군 소속일 뿐 다른 모든 것은 대구에 속해 있다"고 했다. "대구 시내버스는 5분 마다 들어 오지만 왜관 가는 노선은 시외버스가 고작"이라며 "한때 대구 편입을 요구했듯이 주민들의 군 소속감도 거의 없다"고도 했다.
한때 오지로 통했던 팔공산 남쪽 자락 기성리 지역은 더했다. 대구 덕분에 이젠 군에서 가장 잘나가는 곳이 됐을 정도. 버스 조차 다니지 않던 산골 마을에 1백개가 넘는 대형 식당·여관이 들어서면서 대규모 위락 단지로 탈바꿈한 것이다.
구미 쪽은 어떨까? 금오산을 경계로 구미와 접한 북삼면. 왜관읍을 지나 넉넉한 약목지역 평야를 지나자 마자 떡하니 앞을 가로 막는 고층 스카이 라인. 20여층씩에 이르는 아파트들과 잘 닦인 6차로. 여기가 구미인가 칠곡인가.
"주민 90%가 구미 공단에 직장을 두고 있습니다. 구미 시민 상당수도 여기가 으레 구미인줄 알 걸요?" 이 지역 토박이라는 대림부동산 신영철(41) 사장의 말.
"아파트가 들어 서면서 북삼 인구가 3만명을 넘어 왜관읍과 비슷해졌습니다. 이곳 도로 등 도시계획과 상하수도 시설도 칠곡군이 아닌 구미시에서 하고 있지요". 신사장의 말이 아니더라도 아파트 상가 곳곳에 나붙은 '남구미'란 상호에서 북삼면의 처지를 알 수 있었다.
70년대 초 구미 1공단이 본격 개발되면서 공단 배후지역으로 역할하기 시작한 북삼면의 6개 마을 중 임평·숭오·어로리 등 곳곳이 아파트 단지로 개발됐거나 공사가 이뤄지고 있다. 때문에 주민등록 등·초본 발급 외에는 군청은 커녕 면사무소 조차 갈 것 없이 모든 것이 구미에서 이뤄진다는 말이 있을 정도.
김은혜(42·여)씨는 "아파트 단지에서 구미시청까지 10여분 밖에 걸리지 않는다"며 "오래 전부터 행정 구역을 구미시로 옮겨 달라는 요구가 선거 때 마다 끊이지 않고 있다"고 했다. 요즘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오태초교 개교를 둘러싼 구미시와 칠곡군의 신경전도 그래서 빚어졌다는 얘기. 칠곡군은 행정구역상 연고권을 주장하는 반면, 구미시는 '공단 생활권'이라며 맞서 지루한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 학부모 대다수가 공단 사람들이지만 지역을 더이상 구미에 뺏기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칠곡군의 안타까움이 배경에 깔린 듯했다.
낙동강을 경계로 북삼면과 접한 석적면의 상황도 비슷했다. 일부 지역이 이미 20여년 전부터 구미 3공단에 편입돼 있을 뿐 아니라 곳곳에 구미 시민을 위한 대형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고 있었다. 이렇게 보면 8개 읍면 중 절반이 '더 이상 칠곡이 아닌 곳'이 돼 버린 셈.
군청 소재지 왜관읍으로 향했다. 100여개 점포가 빼곡이 줄지어 선 시외버스 정류장 주변 상가 거리. "예전에는 구미에서도 사람들이 많이 왔죠. 밤이 되면 거리가 불야성을 이루고 인적이 끊이지 않았었습니다. 그러나 이젠 활기가 없어요" 이곳에서 20년 넘게 금은방을 운영해 왔다는 도경록(54)씨의 말엔 실망감이 배어 있었다. "이 지역 젊은 사람들조차 손수건 한장을 사도 대구 시내로 나가니 장사가 될 리 있습니까. 전에는 옷집·신발가게 등이 대구 동성로 못잖게 번창했으나 이제 거의 식당으로 바뀌었습니다" '칠곡 본토'조차 도시 기능의 상당 부분을 대구에 잠식당해 버렸다는 얘기.
정체성을 위협 받는 것은 사람들에게 어느것 못잖게 고통스런 일. 여기에 칠곡군의 고뇌가 서려 있었다. "지역을 반으로 갈라 북쪽은 구미로, 남쪽은 대구로 편입시키자는 극단적 제안까지 나올 정도였습니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이 지역은 정체성을 상실한 혼란스러운 상태였지요" 최재영 군수는 그러나 그 오랜 고뇌의 세월을 끝내고 이제 "칠곡군 발전의 방향을 잡았다"고 했다.
내 놓고 말은 안하지만 남쪽은 대구에, 북쪽은 구미에 떼먹힌 것으로 포기하고, 대신 왜관읍을 중심으로 한 '본토'만이라도 야무지게 결속해 독립된 시 승격을 노려 보자는 것인듯 했다. 실제 상당수 지역 유지들이 중심돼 왜관과 몇몇 면을 시로 묶자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어 가고 있기도 했다. 그렇지만 최군수는 이를 우회적으로만 표현할 뿐이었다. "군 전체 인구가 9만을 넘어섰습니다. 2, 3년 뒤에는 시 승격을 이룰 수 있을 겁니다"
최군수는 대구와 구미라는 두 거대 도시 사이에 있다는 지정학적 여건을 십분 활용, 칠곡군을 벤처산업의 보금자리로 만들고, 근교 농업을 활성화시키는 것이 지금 정립된 발전 방향이라고 했다. 외국어대와 영진대 등 앞으로 서너개 대학이 이곳에 들어올 예정이며, 왜관 3공단 조성 사업도 성공적으로 끝나 역내 중소기업 수가 1천개를 넘어서는 등 독립시로서의 기반을 갖췄다고도 했다.
거대 도시들의 흡입력에 살점을 뜯기기만 해 온 칠곡군. 이제 그 고뇌의 세월을 마감하고 나름의 갈길을 확립했다는 자신감. 어떻게 역할을 창출해 갈지, 같은 상황을 겪어온 적잖은 다른 많은 군(郡)들이 더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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