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30년만에 밝힌 '황릉의 비밀'보고서

발굴 30년만에 보고서가 공개된 중국 명대 정릉(定陵)의 비사 '황릉의 비밀'(원제 '풍설정릉'·일빛 펴냄)이 번역돼 나왔다.

정릉은 북경 창평현에 밀집해 있는 명(明) 13릉중 하나로 지난 58년 발굴된 명조 13대 만력제 주익균(재위 1573-1617년)의 무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발굴보고서가 나온 것은 30년 뒤인 89년의 일이다.

'어느 살아남은 고고학자의 기록'이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 이 책은 발굴된후 다시 역사의 어둠속에 묻힌 정릉의 미스터리를 추적해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기록, 독자들의 궁금증을 풀어주고 있다.

'진시황릉'의 저자이자 일련의 고고다큐멘터리를 발표해온 위에난(岳南)과 수필가 양스(楊士)가 공동으로 쓴 이 책은 정릉 발굴과정과 만력제의 통치시대를 소설기법으로 생생하게 재현해내고 있다. 양스는 당시 명 13릉 발굴대원인 조기창의 부인.

40여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정릉 발굴현장을 보자. 중국 공산정권 수립이후 처음 발굴된 정릉은 지하 자금성으로 불릴만큼 방대한 규모와 온갖 부장품이 400년 세월의 간극을 뛰어넘어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다.

발굴당시 정릉은 청백색 돌로 축조된 반달 모양의 지하궁전으로 땅속 27m 깊이에 만들어졌다. 주익균과 두 황후의 시신과 함께 비단 100필, 옥그릇 등 3천여점의 부장품… 명대의 최고급 직조술과 건축술, 매장관습, 심지어 황제의 일상생활과 건강상태까지도 낱낱이 파악할 수 있어 고고학의 보고(寶庫)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면 왜 발굴 30년뒤에야 보고서가 쓰여질 수밖에 없었는가? 그 이유를 이 책은 소상히 밝히고 있다. 문화대혁명의 회오리가 이유다.

문혁 주도세력이 봉건왕조의 묘를 발굴한 발굴대를 반동우익으로 몰아 공격하면서 발굴위원회가 해체되고, 발굴지도자들은 홍위병의 공격을 받아 차례로 죽거나 '하방(下放:시골의 집단 농장 등으로 내쫓김)'되는 수난을 당했다.

하지만 10년 노역에 시달렸던 조기창대원이 버려진 묘지에 숨어 들어가 비밀리에 보고서 초고를 완성, 겨우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중국 문화계의 치부를 드러낸 이 책은 문화적 몰이해를 반성해야 한다는 현대 중국의 교훈이 담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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