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너나 없이 '퇴계' '도산서원' '하회마을' '탈춤' 등이다. 특히 영국 여왕의 방문 이후엔 하회마을을 중심으로 관광객 방문이 급증했고, 탈춤은 국제 규모의 축제로 발전하려 애쓰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근래 들면서, 이러한 안동의 이미지를 보다 근대적인 데까지로 확장시켜야 한다는 논의가 이 지역을 중심으로 번지고 있다. 아직은 물밑 움직임 정도이지만, 뜻있는 사람들은 그 성과가 머잖아 현실화 될 수밖에 없으리라 믿고 있다.
이들이 강조하는 것은 안동이 바로 우리 독립운동의 '성지'였다는 점. 이는 도산서원-탈춤 등으로 이어지는 중세문화적 이미지와는 엄청나게 다른 것. 바로 근세사적인 것이다. 이 점을 잘 쫓아가면, 까딱 '구시대적 문화'로 잘못 보일 수도 있는 유교 자체에 대한 시각의 교정에까지도 이를 수 있다고 관계자들은 기대한다. 안동의 독립운동은 적잖이 유교적 신념에 바탕했기 때문이라는 것.
안동대 김희곤 교수(현대사)에 따르면, 우리 독립운동이 진행된 것은 1894년 갑오의병에서부터 1945년까지의 51년 간이며, 그 시발된 갑오의병이 일어난 곳이 바로 안동이다.
또 현재까지 독립 유공자로 포상된 8천698명(출신지 판명자는 7천781명) 가운데 안동 출신은 246명에 이른다. 이는 전국 시군별 평균 배출 인재 20여명의 12배에 달하는 것이고, 서울·부산·대구·인천·울산·광주·제주 등 도 단위의 배출자 보다도 더 많은 것이다. 전국적으로도 시군 중에서 200명을 넘게 배출한 경우는 안동 뿐이고, 다른 시군 중에선 100명을 넘긴 경우도 드물다.
독립운동 '지도자'를 많이 내놨다는 특징도 안동에 유별난 것이다. 때문에 그들의 활동 영역은 안동이나 경북지역에 머물지 않고, 전국적인 것은 물론이고 중국 등 외국으로까지 뻗어 있다. 특히 경학사(1911) 부민단(1912) 백서농장(1914) 신흥무관학교(1919) 의정부(1925) 혁신의회(1928) 등으로 이어지는 만주지역 독립운동은 안동사람 100여 세대가 망명함으로써 터전을 닦기도 했다.
지도자 공급의 이런 높은 기여도는 국민대표회의(1923), 임시정부 등에 김동삼·이상룡 등의 뛰어난 대표자를 냈던 것에서도 증명된다.
나라가 망하면 따라 죽는 것을 '순절'이라 하지만, 경술국치 이후 순절한 전국의 50여명 중에서도 안동 사람은 8명이나 됐다. 역시 전국 최다.
이런 사실을 감안한다면, 안동은 우리 중세문화의 상징적 도시일 뿐 아니라, 가장 힘들었던 근세사의 상징으로도 당연히 부각돼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중세문화 쪽은 충분히 알려진데 반해 근세사에서의 기여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음으로써, 안동의 이미지가 반쪽으로 축소됐다고 관계자들은 안타까워 하고 있다.
이에따라 최근들어 안동 지역에서는 근세사적 중요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노력들이 점차 본궤도 진입을 시도하고 있는 느낌이다. 안동에 '구국기념관'을 세우자는 제안도 나와 있고, 안동 사람들의 독립운동을 체계적으로 연구·집적한 연구서도 곧 안동시에 의해 발간될 예정이다. 다음달에는 성균관대에서 안동 유림의 독립운동 등을 주제로 한 특별한 학술대회도 준비하고 있다.
朴鍾奉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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