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땅에 스포츠가 본격적으로 뿌리내리기 시작한 지 50여년. 격동의 현대사만큼이나 척박했던 여건속에서도 숱한 스타들과 선구자들이 향토체육의 맥을 면면히 이어가며 큰 족적을 남겼다. 저물어가는 20세기, 향토를 빛낸 체육인을 엄선, 감동의 순간과 영광, 그후의 발자취를 담아본다. -편집자주
지난 79년 7월 20일 서베를린 올림픽스타디움. 동양의 앳된 여고생이 세계양궁사에 길이 남을 경이로운 기록으로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예천여고 김진호(당시 18세). 제20회 세계양궁선수권대회에서 사상 첫 5관왕에 오르며 세계무대에 신데렐라 탄생을 알렸다. 60m 더블라운드에서 세계신기록(643점)으로 첫 금, 50m와 30m 더블라운드에서도 좋은 기록으로 금 2개를 추가한데 이어 개인종합 1위와 단체전 석권. 기록경기사상 한국최초의 쾌거였다. 그녀는 이후 8년간 세계무대를 주름잡는 '신궁(神弓)'으로 통하며 세계양궁의 여왕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명궁의 고향 예천에서 태어난 김진호는 80년대 기록종목의 최고스타였다. 지난 78년 방콕아시안게임 금메달(당시 예천여고 2년)을 시작으로 82년 뉴델리아시안게임 2관왕, 83년 로스앤젤레스 세계선수권대회 5관왕, 86년 서울아시안게임 3관왕 등을 차지하며 세계양궁사를 바꿨다. 선수시절 통산 39개의 한국신기록 작성과 함께 87년 9월 은퇴당시 세계최고기록 3개, 세계기록보다 높은 한국최고기록 7개를 남긴 채 스포트라이트의 뒤켠으로 사라졌다.
그녀는 선수시절 영광과 좌절을 함께 맛본 스타였다. 특히 올림픽과는 인연이 없었다. 80년 모스크바올림픽의 가장 유력한 메달후보였으나 동서대립으로 서양이 대회보이콧을 하는 바람에 참가조차 못했다. 또 84년 LA올림픽에서는 후배 서향순에게 밀렸고 85년 서울세계선수권에서는 후배들에게 무릎을 꿇어 가슴아픈 순간을 맛보기도 했다. 그러나 86년 서울아시안게임 3관왕에 오르며 4년만에 멋지게 재기한 뒤 정상에서 영예롭게 은퇴했다.
단발머리 여고생에서 수줍은 듯한 미소와 차분한 성격으로 국민들의 가슴에 영원한 '처녀궁사'로 새겨졌던 그녀도 이제 불혹의 나이를 바라보는 중년이다. 88년 결혼한 사업가 손근식씨와의 사이에 두 아이를 두고 있고, 모교(한국체대)에서 후진을 양성하는 지도자로 인생의 새 시위를 당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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