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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광장-장수촌

다시 시작하는 천년. 희망과 기대의 서기 2000년. 우리는 또 얼마나 더 오래 살고 더 풍요로운 삶을 살게 될 것인가. 98년말 현재 경북도의 노인인구는 27만7천275명으로 전체 인구 280만9천595명의 9.87%. 해마다 늘고 있다.

도내에서는 새 천년을 맞아 3세기를 살아가는 100세 이상 노인들만도 89명이나 된다. 또 한마을 주민중 65세 이상 노인이 30%가 넘는 곳도 많고 특히 이들중 85세 이상 상노인이 30%가 넘는 마을도 또 상당수가 된다.

이들 마을은 대개가 집성촌을 이루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맑은 공기를 호흡하며 깨끗한 청정수를 마시고 또 이를 생활화한다는 것. 그리고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는 공통점도 발견됐다.

이들 장수마을중 대표적인 마을들을 찾아보고 이들의 건강 장수 비결이 어디에서 연유한 것인가를 확인해본다.

◈◈울진 천연마을

울진군 근남면 행곡리 천연(泉淵)마을. 울진읍에서 약10km 떨어진 서남단 구릉지에 자리잡고 있는 전형적인 산촌마을인 이곳에선 70세 이하의 노인들은 함부로(?) '마실'을 다니지 못한다. 이 마을에서 환갑은 청춘으로 통하기에 70세 이하의 노인들은 어른 대열에도 들지 못하기 때문. 게다가 마실을 나갈 땐 아예 술·담배 등 잔심부름을 할 각오가 돼 있어야 할 정도다.

82가구 189명의 주민 가운데 65세 이상이 57명이며 이중에 80세 이상 고령자는 18명으로 32%를 차지하는 장수마을.

막내 아들까지 장가를 보내고 손주까지 본 정영자(67·여)씨는 마실 다니는 것을 포기한지 오래다. 다른 마을 같으면 경로당에 출입, 어른 대접을 톡톡히 받을 나이인데도 시어머니 장금랑(90)씨가 마을 출입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씨는 마을에서 부러움의 대상이다.

천연마을도 여느 농촌과 마찬가지로 이농현상이 심해 3대가 모여 사는 모습이 흔하지 않는게 현실인데 정씨네는 4대가 함께 살고 있다. 게다가 시어머니 장씨가 아직은 정정해 손수 밥을 짓는 것은 물론 직장 나가는 손자 며느리를 대신해 말썽꾸러기 증손자 형제를 돌보고 밭농사까지 거들고 있는 것.

지난해 12월 초엔 정씨가 계단에서 넘어지면서 가슴을 다쳐 보름가량 누워 있는 동안에도 장할머니가 읍내까지 나가 시장을 보며 며느리 간호까지 했다.

손자 전연우(39)씨가 공개하는 장할머니의 장수 비결은 조식(粗食)과 소식(小食). 육류 등 고단위 영양식보다는 곡식과 야채를 즐겨 먹는 것이다. 또 술·담배는 입에 대지도 않는데다 평소 밭일을 하는 등 노동으로 근력을 유지하는 것도 한 비결.

그리고 가끔씩 이 마을 최연장자인 전옥람(94) 할머니 집에 놀러가 동네 노인들과 덕담도 주고 받거나 국수내기 윷놀이를 즐기며 스트레스를 푸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일이다.

동네 노인들의 쉼터인 전할머니네 사랑방을 찾는 이들은 대부분이 머리가 백발인 80세 이상의 노인들. 가끔씩 들러 잔심부름을 한다는 근남면 부녀회장 남옥랑(61)씨는 이 마을 노인들의 장수 이유로 자급자족 생활을 꼽는다.

천연마을은 대개의 장수촌이 그러하듯 공해가 적고 자연상태의 산나물 등을 섭취하는 전형적인 산촌의 생활상을 띠고 있는데다 산촌답지 않게 비교적 넓은 들판과 풍부한 물을 함께 갖고 있는 게 특징.

마을 한가운데 큰 샘이 있어 유래됐다는 천연(泉淵)마을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차갑고 맑은 물이 풍부한 것도 한가지 요인.

이 마을 사람들은 하나같이 조침조기(早寢早起), 자연 그대로의 리듬에 맞춰 해가 지면 잠자리에 들고 해가 뜨면 일어나는 규칙적인 생활을 한다.

대를 이어 천연동에서 살고 있는 전태석(63) 울진교육장은 "넉넉한 마음과 심산계곡의 맑은 물, 무공해 자연식 등 자연과 함께 지내는 것이 장수 비결"이라며"여기에다 자식들의 효도가 뒷받침되고 있는 만큼 새천년에도 장수마을의 기록은 계속 이어져 나갈 것"이라고 했다. 울진·黃利珠기자

◈◈문경 현리

52가구 133명의 주민 중 65세 이상 노인이 41명(남 19, 여 22명)으로 이 가운데 80세를 넘은 이가 16명이나 되는 벼농사가 주업의 전형적인 농촌마을인 문경시 산양면 현리. 소백산 자락 끝의 나지막한 근품산 아래 맑은 금천 물이 마을을 굽이돌아 흐르는 점촌에서 10km 거리의 이곳은 1가구를 빼고는 인천 채씨로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40, 50대라야 5명에 불과, 마을에 큰일이 생기면 60대까지 상여를 매는 등의 상일꾼 역할을 당연하게 여긴다.

건강식 이야기에 90세 최고령의 한귀출 할머니로부터 노인회 막내둥이 채춘식(66) 할아버지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밥과 된장, 그리고 김치 이상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한다.

술도 "소주 2, 3잔 정도가 공통주량"이라며 마을에 경·조사가 있을 때 소주 한상자(30병)를 소비하지 못한다는 설명으로 대신한다.

담배는 개인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하루 7개비에서 한갑 정도를 피운다고.

"건강비법이 따로 있는것이 아니라 욕심을 부리지 않고 낙천적으로 사는 것"이라는 용띠 채갑식(72) 노인회장.

공해와는 거리가 먼 푸른 숲과 맑은 물, 그리고 깨끗한 공기 속에 아침이면 조깅을 하고 바둑·장기 등으로 시간을 보낸다는데 아침 조깅은 여성들이 더 열심이란다.

2.5km 떨어진 면 소재지와 인근 산북면 노인정까지 바둑내기 원정을 가는 노인들도 많다.

"보건소에서 마을에 직접 나와 성인병 체크와 물리치료를 해주는 등 노인이 많이 사는 덕을 보고 있다"는 채회장은 "오랜 세월을 노인이 많이 사는 마을로 맥을 잇고 있다"고 한다.

용띠인 자신이 "용띠 해, 특히 새 천년을 여는 해를 맞은 것이 감격스럽다"며 마을 주민 모두에게 그리고 모든 국민들에게 건강과 행복이 넘치는 새해가 되기를 기원하고 있단다.

채희창(83) 할아버지는 "6·25 때 인민군은 물론 국군의 발자국도 전혀 닿지 않았던 복된 마을"이라며 일제 때에는 순사부장이 부임하면 곧바로 이 마을 노인들을 찾아 인사를 할 정도로 노인이 많아 대접을 받았다고 회고한다.

심했던 밀주단속도 이 마을에는 한 번도 나오지 않은 곳으로 꼽혔다는 것.

일제 말기에 다른 성을 가진 4가구가 살았는데 그 중 한명이 징용장을 받았으나 마을 채씨측 노인들이 나서 빼 주었고 그때부터 이 마을에는 머슴을 살겠다고 자청하는 젊은이들이 곳곳에서 20여명이나 찾아 와 피난처로 삼았다고 자랑한다. 또 타성 주민의 길·흉사에는 채씨들이 자기 일과 진배없이 협조를 아끼지 않았고 채씨 문중산에 묘터까지 제공했다는 것.

"아무리 어려운 살림을 살아도 자녀교육에는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마을의 전통"이라는 이장 채중기(52)씨는 욕심이 없어도 자녀교육 만큼은 과욕이다 싶을 정도로 열의가 대단하다고 귀띔한다.

채문식(76) 전 국회의장을 비릇, 대학교수, 초중고 교사, 공무원, 군장성, 사업가 등 많은 분야에서 활약했거나 활약하고 있는 인사들이 많다.

신라 때 근품현, 고려 때 가유현·산양현에 속한 '지점마'로 불린 이 마을은 500여년 전 순천 박씨가 개척, 임진왜란 직전에 인천 채씨가 들어 와 살면서 지금의 현리가 됐다는 것이다.

문경·尹相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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