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경쟁력 있는 벤처 육성

▲사회=21세기의 화두인 세계화, 디지털화에 발맞춰 지역에서 경쟁력 있는 벤처를 육성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 자리를 통해 지역 벤처의 육성 전략을 점검해 보았으면 한다. 먼저 벤처가 무엇인지를 짚어보고 넘어가는 게 순서겠다.

▲이=벤처(venture)의 사전적 의미는 모험 또는 모험기업이다. 국내에 벤처가 본격 도입된 것은 97년부터다. 해외에서는 이미 수십년 전부터 등장한 개념이다. 1900년대 경제는 물량 및 요소투입, 대량생산, 공간위주의 포드주의로 대변된다. 이는 20세기 후반 지식기반의 정보산업이 등장하면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90년대 들어 일본 경제가 저성장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한 까닭은 이같은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벤처는 얼음덩이를 깨는 바늘과 같다. 새로운 패러다임을 강요하는 얼음덩이는 대기업이란 망치로는 깨뜨릴 수 없다. 벤처의 등장은 시대적 필연이다.

▲사회=통념적인 벤처와 중소기업청이 지정하는 벤처와는 다소 거리감이 있는 듯 하다.

▲이=사실이다. 중기청이 97년 후반 이후 2년간 인정해 준 벤처는 4천800여개에 이른다. 일본의 4천600여개, 대만의 2천여개와 비교할 때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수적 성장이다. 그러나 실상은 다르다. 벤처를 매출액 대비 연구비 등 정량적 기준으로 정의했기 때문에 숫자가 늘어났을 뿐 벤처정신을 갖춘 업체는 그리 많지 않다. 벤처는 매일 아침 한번씩 모험을 생각해야 한다. 잠시라도 안주해선 안된다. 꾸준히 아이디어를 개발해 내는 것이 벤처고 이를 상품화해 대량생산으로 넘어가면 그때부터는 벤처가 아니다. 최근 전국적인 벤처 열풍이 불고 있으나 거품적 요소가 많아 걱정스럽다.

▲사회=다가올 21세기에 벤처가 지니는 경제적 의미는 무엇인가.

▲김=지금은 컴퓨터 앞에 앉으면 인터넷을 통해 세계 각국의 최신 정보를 손바닥보듯 볼 수 있는 시대다. 따라서 경제의 패러다임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대량생산 위주의 경제구조는 더이상 용납되지 않는다. 무한경쟁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지식산업과의 접목이 필수적이다. 경제구조를 한단계 끌어올리려면 체질을 벤처로 변화시켜야 한다.

▲이=벤처의 도래는 시대적 요청이다. 90년대 초반 불어닥친 세계화 열풍으로 국경없는 무한 경쟁시대가 펼쳐졌고, 정보혁명으로 탈국경화는 더욱 속도를 붙여가고 있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21세기는 비빔밥 재료를 얼마나 더 잘 만드느냐의 싸움이 아니라 이미 갖춰진 재료로 얼마나 맛있는 비빔밥을 만드느냐의 싸움이다. 즉 고급두뇌들이 모여 서로 융합하고 새로운 것을 창출해야 하는 시기다. 서울 테헤란로 10평 남짓한 사무실이 성서공단 5천평 공장이 올리는 매출액 보다 많다. 대규모 공단을 조성해 매출액을 올리는 것은 개발경제시대의 유산이다. 벤처를 통한 생산의 효율화가 급선무다.

▲사회=벤처의 성공률은 극히 낮은 것으로 안다. 국내 벤처의 토양과 기술력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를 조망해 보고 벤처의 생존전략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검토해 보았으면 한다.

▲김=벤처를 흔히 하이 리스크(high risk), 하이 리턴(high return)으로 정의한다. 위험 부담이 큰 만큼 돌아오는 이익도 크다는 뜻이다. 선진국에서 벤처의 성공비율은 1, 2%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벤처 실패는 매우 적은 것으로 나온다. 성공의 잣대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야 한다. 벤처 육성을 정부기관이 주도하다보니 벤처의 실패는 곧 정책의 실패로 인식되는 탓에 정확한 벤처 성공의 통계를 얻기 힘들다.

▲이=국내 벤처 투자자들은 카드게임에서 7장의 패 중 5장을 펼쳐본 뒤 베팅하는 식의 투자를 하고 있다. 코스닥 등록을 앞두고 성공이 뻔히 보이는 기업에 투자할 뿐 창업 초기 기술력만 믿고 투자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도 문제다. 우리 사회에서 실패는 곧 죽음을 의미한다. 외국과 같이 벤처의 성패 책임이 투자자의 몫으로 돌아가는 풍토가 조성돼야 한다. 선진국에서는 실패에 대한 귀책사유를 기업인에게 돌리지 않기 때문에 벤처들이 열심히 기업 발전에 매진할 수 있다.

▲사회=지역의 섬유, 자동차부품 및 기계 산업만으로 지역민을 먹여살리고 지역을 발전시키기에는 한계가 있는 것 같다. 벤처를 제3의 산업으로 자리매김시켜 지역 경제의 돌파구로 활용해야 한다는 지적이 있다.

▲김=어려운 질문이다. 지역의 수천개 중소기업도 나름대로 생존 이유가 있는 만큼 벤처는 그 틈새를 노려야 한다. 대학의 연구인력 및 기술과 산업현장의 생산능력을 접목시킨다면 시너지효과를 통해 벤처가 제3의 산업으로 발전하리라 본다. 특히 지역에선 섬유, 자동차부품 및 기계 관련 벤처를 육성한다면 승산이 있다.▲이=벤처의 제3의 산업화는 선택이 아닌 필연이다. 정체는 침몰을 의미한다. 현체제로서는 인구 350만명의 거대도시인 대구권역을 먹여살리는 것이 불가능하다. 대구권역을 중심으로 1시간 거리에 구미, 포항 등 대규모 생산공단이 있다. 대구는 인재의 유통이 일어나는 구심점으로서 이들 지역의 생산을 효율화하고 고부가화하는 두뇌투자자 역할을 해야 한다.

▲사회=지역 벤처 육성의 전략적 방향은 어떻게 잡아야 할 것으로 보는가.

▲이=섬유, 자동차, 전자처럼 어떤 분야를 육성할 것인가는 중요치 않다. 기계 부품 하나라도 외국 기업들이 앞다퉈 주문을 할 정도의 기술력을 갖추려면 산업 전반의 공조가 필요하다. 최고의 재료기술, 가공기술, 설계를 위한 컴퓨터 기술 등 갖가지 하드웨어, 소프트웨어적 여건이 갖춰질 때 최고의 제품을 만들 수 있다. 벤처 육성의 전략 수립에 있어 특히 주의해야 할 것은 분야별 특화는 곤란하다는 점이다. 단순 생산전문화를 통해 생산 우위를 점할 것인지 두뇌 우위의 산업, 즉 산업구조 고도화를 통한 고부가를 지향할 것인지부터 정해야 한다. 이같은 산업 전반의 고도화를 가져올 핵심기술을 디지털기술이라 부를 수 있다. 대구에 디지털기술을 창출할 뭔가가 들어서면 주변 공단의 고도화는 자연스레 이뤄지고 여기서 발생한 수익은 지역으로 환원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중앙정부나 지자체의 경제시책은 과거 개발경제시대의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느낌이다. 정부의 벤처 육성 정책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나.

▲이=테크노파크 책임자로서 볼 때 중앙정부의 행태는 한심한 수준이다. 테크노파크와 기존의 벤처육성기관을 동일시하고 있다. 테크노파크는 이들 기관을 네트워크화하는 두뇌다. 전체적인 지역발전 방향을 설정하고 그곳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산.학.관.민을 엮어주는 구심점이 돼야 한다. 테크노파크는 벤처 창업만 지원하라고 있는게 아니다.

▲김=동감이다. 앞서 지적했듯이 정부의 벤처육성은 다분히 실적 위주다. 예산을 배정해 지원했으면 최종 결과물이 나올 때까지 인내심을 갖고 지켜봐야 한다. 그러나 정부는 나무를 심어놓고 뿌리도 내리기 전에 실적 확인을 위해 끊임없이 되파기만 거듭하고 있다.

▲사회=테크노파크는 벤처 육성에서 대학의 역량을 극대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대학의 역할과 이를 위해 어떤 점들이 개선돼야 한다고 생각하나.

▲김=대학이 문을 열고 지역 사회와 적극 공조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대학은 열악한 지역 연구환경에 비춰볼 때 그나마 인프라가 갖춰진 곳이다. 벤처가 발을 붙일 수 있는 가장 적합한 터가 바로 대학이다. 교수들도 논문이나 쓰며 안주하려는 자세를 버리고 자신이 몸담고 있는 지역의 발전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나 곰곰히 생각해 봐야 한다. 벤처기업인 교수 밑에서 배우는 대학원생들은 눈빛부터 다르다.

▲이=대학은 상아탑이란 자존심부터 버려야 한다. 순수학문이 아닌 실용학문은 과감히 상아탑의 틀을 깨고 밖으로 뛰쳐나와야 한다. 다국적 기업을 받아들여 이익을 본 유일한 국가가 아일랜드다. 대학들이 문턱을 낮춰 기업들의 인적, 기술적 요구를 능동적으로 받아들인 결과다. 예를 들어 TV 제조공장이 들어서면 공대내에 TV 전공을 신설, 전문인력을 양성해 기업체에 취업시키고 첨단 기술을 산학 협동으로 개발, 기업체의 연구 부담을 덜어준다. 실리콘밸리를 만든 것도 스탠퍼드대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우리나라 대학들은 여전히 고자세다. 과연 각 대학 총장들이 지역 상공계 인사들과 얼마나 자주 만나 지역사회의 발전을 위해 대화를 나눴는지 의문스럽다.

▲사회=벤처 육성의 당위성과 전략적 방향을 짚어보았다. 마지막으로 벤처가 뿌리내릴 수 있는 지역적 토양 조성을 위해 무엇이 필요하고 그 조성 방법론이 무엇인지를 묻고 싶다.

▲김=현재 지역은 정보, 자금, 시장의 총체적 부재로 기껏 육성해 놓은 벤처가 타지로 유출되는 실정이다. 서울의 코엑스와 같은 마케팅센터를 만들어 벤처들이 자부심을 갖고 기업활동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아울러 대기업 연구소를 유치, 고급 첨단기술을 창출할 수 있는 인프라를 시급히 구축해야 한다.

▲이=장기적 안목으로 지역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행정이 아쉽다. 프랑스의 세계적 벤처단지인 소피아 앙티폴리스의 경우 30년전부터 준비해 왔다. 꼬리부터 시작한 것이 30년이 지나자 거대한 용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대구도 벤처특구를 지정, 업체들이 스스로 장기간에 걸쳐 특구를 개발하도록 해야 한다. 물론 20, 30년 뒤에 벤처특구 지정의 결실을 거둔다는 거시적 안목이 있어야 한다.

정리.金秀用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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