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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문 대입논술-쟁점리뷰(삶과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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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이전에 존재하던 과거의 인간 세계에는 종교적인 색채가 상당히 강했다. 그리고 삶과 죽음의 문제도 신의 은총 아래 혹은 왕의 은덕 아래에서 열심히 살다가 죽는 자연적인 과정으로 여겼다. 물론 전염병이나 자연재해에 의해 부딪히는 삶과 죽음의 문제는 있었지만, 그것도 하늘의 뜻을 따른 자연적인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산업 혁명 이후, 특히 20세기에 들어서서 과학의 발전을 통해 자연과의 조화를 잃게 되었고, 1.2차 세계 대전을 겪으면서 인간은 끔찍한 재해로 인하여 죽어 가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정말 비참하고 처참한 광경이었다. 그리고 이전보다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해 더욱 반성하게 되었다. 이런 경향은 실존주의에서 강하게 일어났다. 왜냐 하면, 실존주의에서 '도대체 삶이란 무엇인가? 죽음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을 인지하는 인간이란 무엇인가? 왜 살아야 하는가?' 등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와 반성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야스퍼스에 의하면, 인간은 생존질서의 절대화와 정당화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불현듯 가치에 대한 회의를 통해 불안감이 증가할수록, 파멸 의식도 따라서 증가한다. 이런 것이 인간을 절망에 빠뜨려서 한계상황으로 가게 한다. 그 중의 첫 번째가 죽음이다. 그리고 삶의 과정에서 고통.투쟁.죄책감까지도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죽음을 한계상황으로 경험하지는 못한다. 죽어가면서 괴로워하나 결코, 그 죽음을 경험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죽음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오히려 삶을 통해 변화시켜야 한다. 그러므로 야스퍼스는 '죽음은 나의 삶과 더불어 변화한다'라고 말했다.

사르트르의 경우에는, 죽음을 하나의 부조리(不條理)로 본다. 왜냐하면, 죽음이란 우리들의 자유를 근거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죽음을 생각할 때에는 '모든 의미를 인생에서 제거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즉, 인생은 끝나 버린다. 그리고 사실 죽음에 대한 기대는 그 자신, 즉 그 자체를 파괴할 것이다. 왜냐 하면, 죽음은 모든 삶에 대한 기대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인간 존재, 즉 현 존재는 죽음을 향하고 있는 존재 속에서 일종의 특수한 존재 가능성으로서의 자기 자신에 관계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일상 생활을 하면서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간다. 다른 사람들과 같이 살아가고 있는 이러한 세상의 공공적인 삶 속에서, 죽음은 항상 일어나고 있는 불상사와 같다. 내가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이나, 시시각각으로 죽어간다. 이처럼 죽음은 일상의 삶 속에 존재하는 일종의 낯익은 사건이다. 이러한 죽음은 일상에서 대하는 것들의 특징과 마찬가지로, 눈에 띄지 않는 상태 속에 머물러 있다. 우리 모두는 이미 죽어 가고 있다. 즉, 자신의 종말을 향해 가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자기 자신이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한층 뚜렷하게 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삶과 죽음의 문제를 분리하여 생각하지 않으려는 의견은 또 있다. 오토 프리드리히 볼노우에게서 이와 관련된 좋은 예를 찾아볼 수 있다. 볼노우는 취잘츠의 견해를 빌려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죽음은 세 가지 정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사실로서의 죽음'이요, 둘째는 '확신으로서의 죽음'이며, 셋째는 '경과로서의 죽음'이다. 우리는 '사실로서의 죽음'을 겪어 보지는 못한다. 우리는 그것이 의미상·본질상으로 영향을 미치는 데 따라 그것에 대해 달리 해석할 수 있을 뿐이다. 다음으로, '확신으로서의 죽음'은 우리들 전체의 삶을 그림자 같이 따라 다니고 있다. 그것은 삶을 그림자같이 따라다니므로, 삶 속에 배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인간들은 그것을 느낀 대로 표현하면서 예술이나 문학 등의 다양한 형태로 구체화하고 있다.마지막으로, '경과로서의 죽음'은 사람들이 어느 범위까지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즉, 죽은 상태가 되어 버리는 죽음 자체를 경험하는 것이 아니고 이른바 삶을 마지막으로 작별하는 직전까지를 경험한다.

결국, 인간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구체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자신들의 삶을 영위해 나가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 어떤 삶을 이어갈 것이가는 개인의 선택에 달려 있으므로, 타인에 대한 배려도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죽음이란 결국 그러한 삶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삶의 또 다른 측면이다. 죽음에 대한 인식에 따라 육체적인 삶은 소멸되더라도, 정신적 삶은 영원하게 지속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자손을 통해 육체적인 삶까지 계속 이어가기도 한다. 그렇다고,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 것도 문제가 구체적으로 다가온다는 데 있다. 죽음이란 삶과는 거리가 먼 외적인 어떤 것이 아니며, 삶을 이룩하는 하나의 요소가 된다. 그것은 삶 속의 어디에나 배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죽음을 실존적으로 체득함으로써 그것을 삶 자체 속으로 이끌어 내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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