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캄보디아 사태 25주년

◈공산화 후 국민 40%학살4월은 인도차이나 반도에 중대한 역사적 전환이 있었던 달. 1975년 4월17일에 캄보디아가 공산화됐고, 베트남은 30일에 종전을 선포했던 것. 이번 4월은 그 25주년 되는 달이다.

그 후 캄보디아에서는 전 국민의 40% 이상이 학살당하는 비운의 역사가 시작됐다. 당시 약 700만명이던 국민 중 300만명 이상이 그 이후 (1998년 저항군 마지막 투항 때까지) 희생됐다.

'비극의 시작과 끝' 캄보디아의 비극은 인접 베트남 전쟁과의 연관 속에서 시작됐다. 미국은 은신해 있던 월맹군을 격멸하기 위해 상의도 없이 1969년에 캄보디아를 공습했다. 닉슨 당시 대통령은 나아가 다음해에는 지상군까지 진격시켰다. 그러면서 미국은 공산군에 대한 대응에 미온적인 시아누크 당시 캄보디아 정부를 전복시켰다. 말 잘 듣는 론놀을 시켜 쿠데타를 일으키게 한 것. 그탓에 론놀은 곧장 캄보디아 내 공산세력이던 크메르 루주군과 전투를 시작했다.

하지만 크메르 루주는 베트남의 도움으로 오히려 강성한 군대로 성장했고, 이 때문에 미국은 캄보디아 사태에 더 깊이 개입됐다. 크메르 루주는 나아가 5년만에 프놈펜을 장악했다. 그리고 3년9개월 뒤 '혁명'이 완성될 때까지 170만명이 학살됐다.

'미국 책임론' 캄보디아 적화 25주년이 닥치면서 미국의 대학살 책임 논쟁이 열기를 띠고 있다. 당시의 국무장관이었던 키신저는 아직도 각종 행사에서 관련 힐책을 받고는 당황해 하고 있다.

비평가들은 미국이 베트남전을 캄보디아에까지 확산시킴으로써 평화의 땅을 분쟁에 끌어 들였고, 이것이 결국은 캄보디아에서 크메르 루주를 발호케 한 계기가 됐다고 비판한다. 미국의 폭격이 크메르 루주를 광신에 빠뜨렸다는 지적도 있다.캄보디아에서는 몇년 전까지만 해도 폴 포트, 이엥 사리, 키우 삼판 등 대학살 책임자들의 이름이 교과서에 실리는 등 이들의 책임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들이 대부분 사망한 뒤엔 가급적 거론하지 않는 쪽으로 교육이 이뤄지고 있다. 관계자는 "1993년 선거 뒤에 민족 화해와 평화를 이룩했다"면서 "화해와 연대, 분쟁없는 평화에 교육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말했다.

◈캄보디아 비극사

△1960년= 폴 포트 및 이엥 사리 등이 공산 조직 '크메르 루주' 결성

△1970년= 미국이 지원해 쿠데타 발생. 시아누크 실각, 론놀 집권.

△1973년= 미군 폭격기 캄보디아 폭격. 민간인 다수 사상.

△1975년= 캄보디아 적화

△1976∼78년= 폴 포트 집권, 79년까지 170만명 살해

△1980년대= 미국.중국.태국이 베트남 견제하려 시아누크 세력 지원

△1985년= 훈 센 총리 취임

△1989년= 캄보디아에서 베트남군 철수

△1991∼93년= 유엔 평화유지군 2만명 파견, 선거 준비.

△1996년= 이엥사리, 크메르 루주 일파 이끌고 평화협정 체결.

△1998년= 폴 포트 사망. 크메르 루주 잔당 평화 선언.

훈 센이 새 선거에서 승리, 라나리드 의회 의장 선출.

1960년대 이후 처음으로 캄보디아 전역에 평화 정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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