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 생활에 지친 사람들에게 밤은 여유와 휴식의 시간이다. 검은 여백. 대부분 사람은 이 시간을 그대로 검게 비워 둔다. 그러나 김영환(37)씨는 그걸 되레 희게 칠한다. 다시 낮 같이.
사람 좋아 보이는 큰 눈, 단번에 졸음을 쫓아 버릴듯 큰 목소리. 김씨는 낮에는 한의사 선생님, 밤에는 야학 선생님이다. 낮에는 육신의 아픔을 쓰다듬고, 밤에는 늦깎이들의 마음을 북돋우는 셈.
야학에서 수학을 가르쳐 온 것이 올해로 15년. 1986년 '새얼학교'에서 이 일을 시작했다. 1988년 이후에는 대구 범어동 '화선학교'(범어성당 내)에서 일하고 있다. 지금까지 졸업시킨 학생도 1천명을 훨씬 넘는다. 중학교 혹은 고등학교 과정 졸업장을 손에 쥐고 떠나던 늦깎이 학생들의 뒷모습들이 여러 폭의 풍경화로 그의 가슴 속에 쌓여 있다.
'화선학교'에는 매년 50∼100명의 학생들이 입학한다. 중등부·고등부 1년6개월 과정. 작년에는 특히 성적이 좋아 20여명이 단번에 전과목 졸업 자격시험에 붙기도 했다. 그러나 직장인 혹은 주부들에게 늦깎이 공부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졸업 때까지 버티는 학생은 보통 입학생의 절반 정도.
야학 생활 동안 김 선생은 여러 수십번을 가슴앓이로 몸살해야 했다. 가난과 질병을 이기지 못하고 죽어간 17세의 한 소년은 지금도 가슴 속 응어리로 꿈틀거린다. 야학에 발을 들여 놓던 첫해의 일. 죽어 가는 학생을 업고 보건소로 병원으로 뛰어 다녔지만 끝내 살려내지 못했다. 골수암이 간암·폐암으로 전이될 때까지 제대로 된 치료 한번 받지 못한 소년.
소년의 늙은 어머니는 시장 바닥에서 배추 찌꺼기를 모아 판 돈이라며 50만원을 골방 장판 밑에서 꺼내 놨었다. 그 무서운 병에 기껏 할 수 있는 것이래야 배추 찌꺼기 줍는 일이었던 늙은 어머니! 소년도 죽어서야 병원이란 곳을 구경할 수 있었다.
대학생 시절 한번쯤 기웃거리다 떠나기 십상인 야학. 그러나 그는 이때 이미 자신이 쉽게 야학을 그만두지 못할 것임을 알았다.
'화선학교'에는 특별한 재능을 갖고도 공부할 기회를 갖지 못했던 학생이 종종 입학해 김 선생을 깜짝깜짝 놀라게 한다. 그러나 그 놀람은 이내 분노로 이어진다. 이런 학생을 발견하고도 특별히 도움 줄 수 없는 자신이 너무도 싫기 때문이다. "돈이 없어 못 배우고, 돈이 없어 치료받지 못한대서야 되겠습니까? 선진국이니 해외여행이니 하는 판국인데도요?". 선한 그의 얼굴이 순간 노기로 일그러졌다.
자신도 가난한 집 아들. 교련복 한벌로 삼형제 모두가 고교를 마쳐야 했다. 때문에 김 선생은 "가난이 불편을 넘어 지긋지긋한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돈을 벌면 누구든 돈 걱정 없이 치료받고 공부할 수 있는 시설을 짓고 싶다. "그런 시설이 많아지면 우리 나라는 세상에서 제일 똑똑한 나라, 제일 건강한 나라가 될 겁니다".
버릇처럼 돈 많이 벌어야겠노라 했지만, 딱하게도 그는 돈을 많이 벌 수 있을성 싶지 않았다. 입구도 찾기 힘들만큼 구석지고 꾀죄죄한 한의원, 버는 대로 야학에 쏟아 붓는 손버릇, 무료 의료 봉사…. 개업 10년째라는 한의사가 아직 전세방 신세라지 않는가.
'화선학교'는 야학들이 흔히 겪는 경제적인 어려움으로부터는 어느 정도 자유롭다. 건물 임대료와 전기료 등은 성당에서 떠맡는다. 야학에 대해 특별히 아는 바 없던 새 신부님들도 금세 화선학교에 반해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운동회 경비나 가끔씩 필요한 회식비 정도는 김 선생과 다른 동료 선생님들이 형편에 맞춰 감당한다.
김 선생은 야학에서 오히려 배우는 쪽은 자신이라는 얘기도 했다.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 그 긴 세월을 학교에 다녔지만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았던 진정한 가치, 그것을 여기서 체득했다는 것이다.
지난 9월에 새 과정 입학식이 있었다. 교과서 진도는 이제 1막 1장 언저리를 지나고 있다. 망설이는 지각생이 있다면 곧바로 서둘러 달려와 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배우고 싶은 자 누구든 오라"… 상록수 채영신의 독백은 세월을 훌쩍 건너 여전히 유효하고 있었다.
조두진기자 earful@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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