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 대통령 당선자는 참모들을 중심으로 국정을 운영하되 최종 결단은 스스로 내리는 보스형 지도자. 텍사스 주지사로서도 이런 면모가 드러났다. 참모들에게 절대적 신임과 함께 합당한 권한을 부여하고, 결정을 내려야 할 사안에 대해서는 권고안을 제출토록 해 최종적인 판단은 자신이 내려 왔다.
따라서 그는 대통령에 취임하더라도 국정 운영의 세부적 사안은 참모들에게 일임하고 자신은 인간적 매력과 친화력을 이용해 의회와의 원활한 관계 유지 등에 정치력을 쏟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그는 워싱턴에서의 경험이 전무한 정치 초년병. 그러나 정치 가문 출신으로 이번 대선에서도 그 후광을 입었다. 아버지는 8년 전까지만도 제41대 대통령으로 재임했으며, 조부는 코네티컷주 상원의원을 지냈다. 동생은 현직 플로리다 주지사.
1946년 장남으로 출생. 아버지에 이어 예일대를 졸업(1966년)한 후 하버드에서 경영학석사를 받았다. 1975년 석유 중개회사를 차려 운영했으나 사업 수완을 발휘하지 못했다. 1987년 아버지의 보좌관으로 대선 캠프에 합류, 정치수업을 시작했다. 이듬해엔 프로야구 텍사스 레인저스 팀을 운영하면서 대중적 인기를 맛봤다. 1994년에 이어 98년 텍사스 주지사에 재선됐다.
'온정적 보수주의'를 표방, 주지사로서 교육 및 범죄퇴치 부문의 정책으로 상당한 평가를 받았으나, 국제문제에 관해서는 문외한이라는 지적을 받아 왔다. 젊은 시절 한때 방황하면서 심한 음주벽을 지녔었으나 40세 이후 술을 끊었다고 밝히고 있다.
부인 로라 웰치 부시(53) 여사는 지적이고 현숙한 이미지 때문에 백악관 안주인으로 적격자란 평가를 받고 있다. 완벽한 내조 스타일. 주지사 부인으로서도 귀빈 만찬을 주최하기 보다는 가족과 함께 지내는 게 훨씬 더 편하다는 자칭 가정주부. 어릴 적 약간 외롭게 성장해 가족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
부시와 1977년 결혼할 당시 "결코 남편을 위해 정치연설은 하지 않는다"는 서약을 받고 청혼을 수락했을 정도로 정치를 싫어했다. 그러나 이번의 경우는 다르다며 남편의 캠페인을 열심히 지원했다.
1946년 텍사스의 조용한 소도시 미들랜드 출생. 주택 건설업자였던 아버지와 어머니가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어 혼자 자랐다. 때문에 대가족인 부시 가문에 시집 온 것을 행복으로 여기고 있다. 이러한 자세는 시어머니 바바라 여사로부터 "우리 가족의 촉매"라는 찬사를 이끌어 냈다.
텍사스주 남부감리교대학 교육학과를 졸업한 후 텍사스대에서 사서학을 전공했다. 초교 교사 생활 중이던 31세 때 친구 파티에서 부시를 소개받아 3개월만에 결혼했다. 1981년 쌍둥이 딸을 임신했다가 독혈증으로 위기를 맞았었다.
아내로서 조용한 압력을 가해 남편으로 하여금 결혼 5년만에 술을 완전히 끊게 했다. 자신도 10대 때부터 피우던 담배를 끊었다. 정치 대신 조기교육 및 청소년 문맹 퇴치 운동, 예술 및 유방암 조기 진단을 위한 기금모금 운동 등에 헌신해 높은 평가를 받았다. 독서광이기도 해 텍사스주 도서축제를 마련, 저명한 작가들을 격려하고 350개의 공립도서관을 위한 기금 90만 달러를 모금하기도 했다.
부통령에 당선된 딕 체니(59) 전 국방장관은 행정부·의회·기업 등에서 항상 성공을 거둔 후 이제 부통령에까지 오르게 된 행운아.
1991년 걸프전 때 국방장관으로서 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대통령 당선자의 아버지가 대통령일 때 국방장관을 지내, 부시 일가와는 2대에 걸쳐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됐다.
네브래스카주 링컨에서 태어나 예일대를 중퇴하고 와이오밍대에 들어가 1965년 정치학 학위를 받았다. 그 뒤 행정부 관리, 하원의원, 기업인 등 다양한 인생 행로를 걸었다. 1960년대 말과 70년대 초에는 닉슨 행정부에서 하급·중급 관리로 일했고, 포드 대통령 때는 34세의 젊은 나이에 대통령 비서실장에 임명돼 비상한 능력을 인정 받았다.
1978년부터는 와이오밍주 하원의원으로 10여년간 활동했으며, 이어 국방장관이 됐다. 장관 때 베이커 당시 국무장관과 함께 미국의 대외정책을 주도하고, 특히 북한을 비롯한 제3세계의 핵과 미사일 개발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유럽과 아시아 주둔 미군의 전진 배치도 강력히 주장했었다.
장관을 그만둔 뒤 1995년에는 거대 석유시추사 홀리버튼의 대표이사로 취임, 사업가로서의 수완도 발휘했다. 무난한 성격 때문에 적이 별로 없고, 충성심 또한 강하다.
그러나 1978·84·88년에 가벼우나마 심장발작을 일으킨 바 있다. 1988년 4차례에 걸쳐 바이패스(側副路) 수술을 받고 난 이후엔 문제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부인 린 여사는 작가. 잡지 '워싱토니언'의 편집장을 지냈고, 대학강단에도 선 바 있다. 슬하에 두 딸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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