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쌈이 여름에 하는 일이라면 바느질은 겨울에 하는 일이다. 여름에는 손에 땀이 나서 바느질을 하지 않고 겨울에는 삼베가 잘 부서져서 길쌈을 잘 하지 않는다. 이제 설대목이 머지 않았다. 예전 같으면 아낙네들이 설빔을 장만하느라 바느질로 겨울밤을 밝힐 때이다. 바느질하는 여성에게 바늘은 더 없이 소중한 귀물이다. "인간 부녀의 손 가운데 중요로운 것이 바늘이로다" 하며, 시작되는 유(兪)씨 부인의 조침문을 보면 "연전에 우리 시삼촌께옵서 동지상사 낙점을 받아 북경을 다녀오신 후에 바늘 여러 쌈을 주시거늘, 친정과 원근 일가에게 보내고, 비복들도 쌈쌈이 낱낱이 나눠"주었다는 대목이 있다. 귀한 물건일수록 아낌없이 나누어 쓰는 미덕이 보인다. 정가에는 뭉칫돈을 찔러 준 '게이트' 문제로 온 나라가 계속 요동치고 있다. 왜 귀한 돈을 듬뿍 나누어주고도 이 난리일까. 돈 귀한 줄 몰라서 그런가. 여성들의 귀물인 바늘노래를 들어보자.
수중에는 보물이요
장중에는 구슬이라
대국천자 용포라도
널로 하여 지어내고
성주 사는 하석준 할머니의 바늘노래이다. 바늘이 수중(手中)의 보물이요 장중(掌中)에 구슬이라 여기는 것은 그 규모나 형상 때문이 아니라 그 쓰임새를 두고 하는 말이다. 바늘이 없다면 중국 천자라도 용포를 입을 수 없어서 천자 노릇을 온전히 수행할 수 없다. 바늘이 작아도 그 쓰임새는 엄청나다. 그런데 사람들은 사물의 쓰임새보다 외양이나 크기를 먼저 따진다. 무엇이든 큰 것 좋아하는 사람일수록 그것을 잘못 써서 일을 그르치기 일쑤이다. 큰 권력을 쥔 사람이 비리에 연루되어 제 권력을 온당하게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 좋은 보기이다. 큰 권력은 항상 큰 비리와 짝을 이루는 셈이다.
낭클 숨가 낭클 숨가
물을 조여 물을 조여
하루 아칙에 키운 나무
아람으로 열두 아람
한 가지는 해가 열고
한 가지는 달이 열고
달은 따서 안을 옇고
해는 따서 겉을 하고
쌍무지개 선을 둘러
굵은 실로 상침 놓고
가는 실로 선을 둘러
올라가는 신감사야
내려 오는 구감사야
정차로 귀경하고 가세
선산 사는 길말임 아주머니 소리이다. 바느질하는 여성의 꿈이 아름답다. 나무를 심고 물을 주어 아름드리 나무로 자라게 하는 것이나, 가지에 해와 달이 열리게 하는 것은 옷감에 그러한 문양의 수를 놓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수를 놓고 쌍무지개 선까지 둘러서 바느질을 하였으니, 올라가는 신관사또나 내려오는 구관사또나 행차를 멈추고 구경을 하고 가라 할 만하다. 신구의 가림 없이 자신 있게 바느질 솜씨를 드러내 보이려는 당당함이 부럽다.
김대중 정부도 출범 때 꿈은 이러했을 것이다. 해와 달은 아니라도 개혁정치와 민주정치의 결실을 맺고, 그것을 바탕으로 새 정치의 구도를 설계할 희망을 품었을 것이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밤낮으로 물을 주어 정치나무를 가꾸었다면, 당대의 국민여론을 저버린 채 굳이 역사의 심판을 받겠다는 엉뚱한 고집은 부리지 않았을 것이다. 역사의 심판이 당대의 민심보다 더 준엄한 줄 모르는가보다.
명주고름 살피 달고
동해 끝에 동정 달아
아즉 이실 살끔 맞차
은다리비 뺨을 맞차
개자 하니 살이 지고
입자 하니 때가 묻고
횃대 끝에 걸어 노니
심청머리 계모어미
단 불에다 팍 집어 옇네
진주 사는 강아이 할머니 소리이다. 아버지가 서울에서 떠온 흰 비단을 다듬이질하고 바느질하여 깃도 달고 명주 고름까지 달았다. 그리고 아침 이슬을 살짝 맞추어서 다림질까지 해놓았는데, 개어 두자니 주름살이 지고 입자니 때가 묻을 것 같아서 횃대 끝에 고이 걸어두었다. 그러자 심술머리 사나운 계모가 불에다 집어넣어 버렸다는 것이다. 모든 정성이 수포로 돌아간 셈이다.
그 동안 국민들이 대통령을 잘못 뽑아서 권력비리가 많고 정치가 저질인 줄 알고, 모처럼 붓대를 똑바로 찍고 대통령을 제대로 뽑았지만 별 수 없다. 권력이란 계모가 심술머리 사나운 탓인지 검찰과 국정원은 물론, 친인척까지 끌어들여 잘난 대통령마저 속수무책으로 만들어 놓고 말았다.
줌치 주운 사흘만에
꽃상여가 들어오네
딸아 딸아 맏딸아가
서답 빨래 니 갔더나
냉수 길러 니 갔더나
아부지요 그 말 마소
통시질도 머다 한데
냉수 길이 당합니꺼
서답 빨래가 당합니꺼
딸아딸아 셋째딸아
속적삼을 벗어 갖고
상여방틀 걸어주라
염청염청 셋째딸아
속중우로 벗어갖고
상여방틀 덮어주라
숨내 맡고 떠나거로
땀내 맡고 떠나거로
의령 사는 박연악 할머니의 바느질 노래이다. 처녀가 강에 빨래하러 나갔다가, 물을 달라며 접근하는 도령이 떨어뜨린 주머니가 하도 좋아서 품에 지니게 되었는데, 사흘만에 도령의 꽃상여가 들이닥친다. 아버지가 눈치를 채고 딸 셋을 불러서 차례로 빨래하러 갔던가, 아니면 물 길러 갔던가 하고 따져 묻는다. 맏딸과 둘째딸은 '아버지요 그 말씀 마시오. 통시(뒷간) 길도 멀다고 안 가는데 냉수를 길러 가거나 빨래하러 가겠느냐' 하고 딱 잡아떼는데, 셋째딸은 실토정을 한다. 아버지는 당장 셋째딸에게 속적삼을 벗어 상여를 덮어주고 안되면 속고쟁이까지 벗어서 땀내나마 맡고 상여가 떠나도록 하라고 일러준다. 그러자 딸은 아버지에게 대나무로 흰 가마를 만들어 달래서 타고 아예 상여를 따라나섰다. 참으로 가상한 부녀다. 아버지나 딸이나 사실상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죽은 도령에게 작은 빌미라도 주었으므로 기꺼이 상주 노릇을 하여 그 영혼을 달래고자 한 것이다. 세모에 대통령 아들까지 요상한 '게이트'와 각종 '로비'에 연루된 의혹이 거듭 제기되고 있다. 작년부터 불거진 '게이트'는 종류도 많으려니와, 억지로 덮으려다가 다시 파헤친 탓에 몇 해를 넘길 요량인지 밑도 끝도 없다. 연일 터지는 '게이트'와 '로비' 바람에 검찰과 국정원은 물론 청와대까지 돈 냄새를 풍기게 되었다. 새천년준비위원회가 100년 동안 '천년의 문'을 12개나 짓겠다고 했는데, 예산 낭비와 효용성 문제로 시민단체의 반대운동에 부딪혔다가 마침내 '밑 빠진 독에 물붓기 상'까지 받고서야 무산되었다. 그런데 김대중 정부가 끝없는 비리 '게이트'로 천년의 문을 대신하게 되었다.
일년 전 대통령에게 민주당 총재직을 던지라고 언론에 공개편지를 썼던 이가 다시 김홍일 의원에게 공개편지로 세 가지 건의를 하였다. 첫째 아버지에게 국정쇄신을 강력히 권하고, 둘째 정치자금에서 스스로 해방되며, 셋째 의원직을 과감하게 던지라는 내용이다. 바느질 노래처럼 아버지가 나서서 딸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니, 아들을 통해서 아버지의 문제까지 해결하기를 기대하는 편지를 띄운 셈이다. 인적쇄신을 요구하는 여당 의원들의 충정조차 일년 이상 묵살하고 있는 대통령 부자가 이런 쓴소리에 과연 귀기울일까.
'단돈 몇 푼이라도 받았다면 할복자살하겠다'며 국민들에게 큰소리 친 신아무개의 장담이, '적에게 붙잡히면 나를 쏘아달라'고 부하에게 당부한 빈 라덴의 명령보다 더 테러리즘 닮지 않았는가. 세모가 어둡다 못해 붉다.
댓글 많은 뉴스
"극우와 단호히 싸우겠다"…한동훈, 국힘 전당대회 불출마 선언
李대통령 "재난상황에 '음주가무' 정신나간 공직자 엄벌"
기초수급자 낙인? 소비쿠폰 선불카드에 '43만원' 금액 인쇄
韓美 외교 접촉 반복적 취소…트럼프의 의도적 밀어내기?
李 대통령, '이주노동자 지게차 결박'에 분노…"세계가 한국을 어찌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