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교실밖의 넓은 세상-대안학교 경주 화랑고

봄볕이 조금은 따갑게 느껴지던 지난 20일 낮 12시15분. 경주 골굴사 선무도 학교 서늘한 수련관에 30여명의 학생들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대안학교인 경주화랑고 1학년생들. 몸에 힘이 넘치고 마음은 스스로도 종잡기 힘든 질풍노도의 시기, 더욱이 모두들 개성이 강하다보니 정신 집중은 고사하고 자세를 유지하기도 쉽잖아 보였다.

그래도 자신을 털고 새로운 경지로 나가 보려는 진지함에 있어서는 선승들 못잖았다.

경주에서 감포 쪽으로 가다 오른쪽으로 난 작은 길을 따라 잠시 올라가면 화랑고가 있다.

골굴사를 나와 학교로 향하다 보니 개울가를 서성이거나 돌덩어리를 들고 오가는 학생들의 모습이 보였다.

텃밭에 돌탑을 쌓기 위해서라고 한다.

운동장에선 체육수업이 한창이었다.

머리는 제멋대로, 사탕을 문 학생도 있다.

왁자지껄, 웃음소리도 연신 터져나왔다.

"운동장 두 바퀴"라는 교사의 고함소리에 있는 힘을 다해 달리면서도 웃음은 끊이지 않았다.

운동장 앞을 지나던 교장 선생님을 보자 모두들 "스파이크 새로 샀어요. 예쁘죠"라며 발을 들어보였다.

교사도, 교장도 학생들과 허물이 없었다.

마치 절친한 친구나 선후배처럼.

오전에 인문계 수업을 마친 학생들은 오후에 특성화 교과를 배운다.

선무도를 비롯해 텃밭 가꾸기, 행동예절, 유적 답사 등 일반 학교에서는 볼 수 없는 과목들이 대부분이다.

물론 다른 고교처럼 교과 특기·적성교육도 있고, 3학년생들은 교과심화수업, 논술·면접에 대비한 토론수업 등도 한다.

대학 진학은 대안학교 학생들에게도 쉽사리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지난 2월 학교를 마친 3회 졸업생 35명 가운데 2명을 빼고는 대학에 진학했다.

학년별로 40명씩 모두 120명이 기숙사 생활을 하는 이 학교에선 아침 저녁 프로그램도 중요하다.

동아리 활동이나 특기 교육 등도 있지만 가장 비중을 두는 건 마음공부다.

대안학교 가운데 상당수가 종교단체에서 운영하는 것처럼 화랑고는 원불교에서 설립해 운영한다.

이를 바탕으로 한 것이 마음 대조 공부. 물론 신앙을 요구하거나 믿음을 강요하는 게 아니라 인성교육의 한 방편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마음공부는 오전 5시30분 새벽 좌선에서 시작한다.

참가는 자유지만 교사까지 포함해 매일 10명 안팎이 자리를 채운다.

오후에는 6시30분부터 학년별로 자유롭게 이뤄진다.

이 역시 참가는 자유. 단 한 번 전교생이 참가하는 건 잠들기 전 오후 9시부터 30분 동안이다.

교사들이 아니라 3학년생들이 1, 2학년생을 맡아 지도하지만 하루를 되돌아보고 반성하며 새로운 각오를 다지는 분위기는 숙연하기까지 하다.

학교시설을 돌아보니 체력단련실, 노래방, 당구장, 댄스실 등 없는 게 없다.

그래도 서종호 교장은 "디스코텍을 빨리 만들어줘야 하는데"라며 걱정이었다.

복도벽엔 행사사진이 가득했다.

화랑고에서는 사실상 일년 내내 행사가 이어진다.

테마가 있는 다양한 체험학습이나 워크샵 같은 교육활동 뿐만 아니라 체육대회, 마라톤대회 참가, 야간 담력 산행 훈련 등이 계속돼 심심해할 틈이 없을 정도. 특히 3박4일 동안 자신과의 싸움을 하면서 서로 어깨를 걸어주고 등을 밀어주는 지리산 종주가 인기 프로그램이다.

소록도 봉사활동도 빼놓을 수 없다.

학교와 기숙사 생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학생들을 상대로 한 이 활동은 학생들에게 진정한 봉사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는 계기가 됐다는 것이 학교측의 평가다.

밥을 짓기 위해 새벽잠을 깨우고 벽지 바르기, 하수도와 바닷가 청소, 밭 갈기 등 하루종일 마을의 크고작은 일들을 맡아 하면서 삶의 의미를 깨우친다는 것. 고통과 불편을 겪고 있는 환자들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소중함도 배우게 되더라는 설명이다.

화랑고가 설립된 건 1998년이다.

어렵사리 시설을 마련해 학생들을 받았지만 초기 운영은 쉽지 않았다.

재정 부담이 컸지만 무엇보다 학생들 사이에 벌어지는 크고작은 폭력과 마찰이 문제였다.

중학교 때까지 개인적으로, 그것도 개성이 강하게 생활해오던 학생들이 5, 6명씩 기숙사 같은 방에서 부대끼다 보니 말썽이 생길 수밖에 없는 노릇.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문제는 풀려나갔다.

교실에서의 틀에 박힌 모습 뿐만 아니라 푸석푸석 잠이 덜 깬 얼굴, 피로와 고민에 찌들린 베갯머리 얼굴들을 1년이 가고 2년이 지나도록 마주하다 보면 서로에 대한 이해가 넓어질 수밖에 없는 것. 절망이나 분노, 슬픔과 아픔을 같이 하는 진정한 벗이 되고 있었다.

여기에 교사들의 헌신적인 애정이 뒷받침됐음은 물론이다.

서 교장은 "버릴 아이는 하나도 없다"고 몇 번이나 강조했다.

기물을 부수고 심지어 교사를 폭행하는 일까지 벌어졌지만 쫓겨나간 학생은 없었다.

무한한 인내는 결국 '성공한 대안학교'라는 평가로 꽃을 피웠다.

일반 학교에 다닐 자신이 없어 화랑고에 입학했지만 여기서도 2년 동안 겉돌았다는 김희움군. 그는 올해 목표를 "학교에서 하라는대로 해 보는 것"이라고 했다.

이 나라 대부분의 고3생들이 수업과 야간자율학습의 쳇바퀴 속에서 "올해만 지나면 학교에서 하라는대로 하지 않아도 된다"는 슬픈 기대에 빠져있는 것과는 사뭇 다른 얘기. 스스로를 낮추고 앞으로의 진로를 심각하게 결정해야겠다는 김군은 "공부를 잘 할 수 있는 사람보다 인생을 잘 살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으면 이 학교에 오라고 하고 싶다"고 했다.

김재경기자 kjk@imaeil.com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