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역사고갱이-임진왜란.정유재란

1592년(선조 25년)에서 1598년(선조 31년)까지 2차에 걸쳐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전쟁. 임진년에 일어나 임진왜란, 정유년에 또다시 쳐들어 왔기에 정유재란이라고 한다.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국을 통일하고 지배권을 강화했다.

통일 후에는 전국 제후들의 힘을 밖으로 돌려 내부 불안을 없애려 했다.

특히 유럽과 거래로 성장한 신흥 상업세력을 억제하기 위해서도 대륙침략은 필요했다.

일본은 1592년(선조 25년) 4월 15만 대군으로 조선을 침공했다.

고니시 유키나가를 선봉으로 하는 1군이 부산을 함락, 가토 기요마사와 구로다 나가마사 등과 합세하여 세 갈래로 나누어 침공했다.

5월 2일 한성이 함락되고 6월 평양이 무너졌다.

대궐이 불타고 임금이 피난을 갔다.

백성들의 원망이 극도에 이르렀다.

가토 기요마사는 회령에서 조선의 왕자를 포로로 잡았다.

해상에서 전라 좌수사 이순신이 일본 수군을 격파했다.

1차는 옥포에서, 2차는 사천, 당포, 당항포에서, 3차는 한산 앞바다에서, 4차는 부산 해전에서 적선을 격파했다.

이순신은 적의 통로와 보급로를 차단, 전쟁승리의 기틀을 마련했다.

내륙에서는 의병이 일어나 왜군에 항전했다.

명나라의 도움을 얻어 평양을 다시 찾았다.

권율의 행주대첩, 김시민의 진주대첩, 이순신의 한산도 대첩은 임진왜란의 3대첩으로 기록됐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일본은 화의에 나섰다.

그러나 2, 3년 만에 화의는 결렬됐다.

일본의 무리한 요구 때문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4만 대군으로 재침공해 왔다.

1597년(선조 30년)의 정유재란이다.

이번에도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가 선봉에 섰다.

그들은 이순신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간첩을 침투시켜 이순신을 모함하고 축출했다.

이순신이 없는 틈을 타 일본군은 해상을 장악했다.

원균 등이 전사하고 조선의 전선이 대파됐다.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이 총반격을 시작했다.

다시 기용된 이순신이 선박 12척으로 명량에서 적의 함대 133척을 격파했다

그 무렵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왜군은 그의 유언에 따라 후퇴했다.

이순신은 노량에서 퇴각하는 적함 200여 척을 격파하고 전사했다.

7년간의 왜란으로 조선은 황폐화되고 백성은 도탄에 빠졌다.

경제적 파탄과 사회 질서의 붕괴를 가져왔다.

인명은 말할 것도 없고, 문화재의 손실도 많았다.

각처에서 도둑이 날뛰었다.

일본은 전후 봉건 제후의 세력이 약화됐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전국시대'를 끝내고 권력을 장악했다.

조선인 포로를 경작노동에 투입했다.

경작 노예 매매의 시작이었다.

조선인 포로들 중에는 도자기 기술자가 있어 일본 도자기업을 발전시켰다.

명나라는 대군 파병으로 국력이 소모된 데다 국가 재정까지 어려워져 멸망하는 계기가 됐다.

▲서기 1419년(세종1년)=세종은 이종무(李從茂)를 시켜 왜구의 소굴인 쓰시마섬을 정벌했다.

이후 쓰시마 도주(島主)가 사죄하고 통상을 간청해오자, 1426년 삼포(三浦)를 개항했다.

왜인의 출입이 증가했다.

1443년 왜인의 출입을 통제하기 위하여 신숙주의 교섭으로 변효문과 쓰시마 도주 사이에 계해조약(癸亥條約)을 체결했다.

1년 동안 입항할 수 있는 세견선(歲遣船)을 50척으로 제한했고, 세사미(歲賜米)를 200섬으로 제한하는 한편, 반드시 수도서인(受圖書人)에 한하여 왕래하도록 무역과 출입을 통제하였다.

▲서기 1510년(중종 5년)∼1544년=삼포왜란(三浦倭亂)이 일어나 경상도 해안이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이 난으로 조선과 일본의 통교가 중단되었으나, 일본의 아시카기 막부의 간청에 의하여 1512년 임신조약을 체결하였다.

임신조약 후 조선은 종래 쓰시마에서 보내던 무역선인 세견선과 그에 대한 응답으로 조선 조정에서 보내던 세사미두를 반감했다.

또 상주하던 왜인들의 삼포 거주를 엄금하고 제포 하나만을 개항하는 등 왜인들의 출입을 엄격히 제한했다.

엄격한 통제에도 불구하고 왜인들의 변란은 자주 일어났다.

1522년 5월에는 추자도 왜변, 동래 염장의 왜변, 1525년 왜구의 침입 등이 잇달았다.

1529년에는 전라도 왜변, 1544년에는 사량진 왜변이 발생했다.

이 사량진 왜변으로 조선은 왜인들의 내왕을 완전히 금지시켰다.

▲서기 1555년(명종 10년)=왜구가 전라남도 연안 지방에 침입한 사건. 1510년 삼포왜란 이후 조선 정부가 왜인들의 왕래와 상품 거래를 엄격히 제한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왜구들이 일으킨 난. 왜구들은 전라남도의 달량성, 어란포, 장흥, 강진, 진도에 침입하여 갖은 만행을 저질렀다.

왜구들이 조선군에게 쫓겨 돌아간 후 쓰시마 도주는 을묘왜변에 가담한 왜구들의 목을 베어 보내 사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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