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 단편소설 '바다로' 노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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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삐용을 못 찾았으니 조심할 것'.

나는 급하게 휘갈겨 쓴 쪽지를 식탁 위에 올려놓은 후, 연필 깎는 칼을 집어 주머니 속에 넣고 집을 나섰다.

거리에는 스산한 바람이 가득했다.

미처 말리지 못한 젖은 머리카락에 바람이 닿자, 선뜩해서 몸이 오그라들었다.

따뜻한 집안에 있었기 때문인지 추위가 더 느껴졌다.

늦가을의 날씨를 짐작하지 못하고 가벼운 옷차림으로 나온 것을 후회했지만, 되돌아가기에는 너무 늦어 있었다.

창문을 닫은 집들이 마치 웅크리고 있는 집게들처럼 보였다.

수시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 때문에, 노란 은행잎들은 함박눈처럼 분분히 흩어져 내리고 갈색으로 오그라든 플라타너스 잎들이 대지 위에 툭툭 떨어져 뒹굴었다.

잎들이 바닥에 부딪혀 뒹굴 때마다 발길이 자꾸만 멎었다.

빠삐용도 그렇게 떨어졌을 것만 같았다.

도대체 어디로 간거니? 너… 아직 살아있기는 한 거니? 죽으면 안돼. 너, 절대로… 나는 마치 녀석이 듣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낮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빠삐용을 찾느라고 아침부터 아무 일도 못하고 두 시간이 넘도록 집안을 뒤졌던 터였다.

시계가 열 시를 가리키는 것을 보고서 녀석을 찾는 일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지쳐서 풀썩 주저앉을 때는 어질머리까지 일었다.

머리카락이며 옷에는 먼지가 수북했다.

손톱 밑에도 흙이 끼어 있었다.

아침밥도 먹지 못했다는 생각이 그제서야 들었다.

울면서 학교에 가던 세화를 생각해서라도 꼭 찾고 싶었다.

진희와의 약속만 아니었다면 녀석을 찾아낼 때까지 하루종일이라도 집을 뒤졌을 것이다.

어디선가 녀석이 서서히 죽어갈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옥죄어들었다.

나는 걸음을 더욱 빨리 했다.

집게 두 마리가 우리 집에 들어온 것은 열흘 전이었다.

상기된 얼굴로 뛰어들어온 세화의 손에 밥그릇 만한 크기의 투명한 플라스틱 상자가 들려 있었다.

높이가 8센티미터 정도 되는 투명한 상자 속에는 손가락 두 마디 정도의 두께로 톱밥이 깔려있었다.

세화가 뚜껑을 열고 손가락으로 톱밥을 휘저었다.

세화의 손에 잡혀 올라온 것은 엄지 손톱만한 두 개의 동그란 소라고둥이었다.

매끄럽고 연한 미색 바탕에 작고 까만 점들이 총총히 뿌려져 있어 귀여웠다.

이 삼분 정도 조용히 기다리자, 껍질 밖으로 가느다란 다리 하나가 주춤거리며 나왔다.

집게는 뾰족한 발톱으로 바깥 세상을 탐지하기라도 하듯 탁자 유리를 톡톡 쳤다.

잠시 후 두 마리의 집게가 거의 동시에 몸을 드러냈다.

거미처럼 보이기도 하는 몸은 거무스름했고, 가늘고 긴 여러 개의 다리에는 거뭇한 털이 부숭부숭 나 있었다.

다리 끝은 고양이의 손톱처럼 날카로워 보였다.

집게는 껍질 속에 하체를 숨긴 채, 달팽이 눈처럼 튀어나온 두 개의 눈을 움찔거렸다.

나는 귀여운 껍질 속에 숨어있던 집게의 모습이 흉칙한 것에 경악했다.

비위가 상해서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말끔한 인상을 가진 남편의 모습이 떠올랐다.

내가 벌떡 일어서자 집게들이 재빨리 고둥 속으로 숨어버렸다.

"갖다 버려".

입술을 삐죽이는 세화에게 소리를 지르고는 황급히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어썼다.

이불에서 남편의 냄새가 진하게 풍겨왔다.

새로 산 스테인리스 그릇에서 나는 듯한 남편 특유의 서늘한 금속 냄새와, 남편이 밖에서 만나고 다니는 여자가 남편에게 선물한 스킨 로션의 향이다.

나는 거칠게 이불을 둘둘 말아서 세탁기에 집어넣었다.

시트와 베갯잇을 모두 벗기고, 남편의 옷가지들을 몽땅 들어내서 거실바닥으로 동댕이쳤다.

통속에 집게들을 담고 있던 세화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버스에서 내리자 우리가 약속한 장소인 카페가 보였다.

몇 달 전과는 달리 간판의 크기가 커졌고, 화려한 장식으로 문을 꾸며 놓은 것이 눈에 띄었다.

가스 난로를 때고 있어서 카페 안은 훈훈했다.

"정말 오랜만이네. 반갑다 얘".

진희가 읽고 있던 책을 덮으며 환하게 웃어주었다.

"아아, 추워서 혼났어. 감은 머리 말리지도 못하고 나왔거든. 너무 오래 기다렸지?"

나는 미안한 마음에 목소리를 높였다.

"아침부터 바쁜 일이 있었나 보구나".

나는 진희에게 빠삐용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기로 마음먹었다.

진희는 녀석과 나를 이해해 줄 것이다.

세화는 집게 두 마리를 기르기 위해 정성을 많이 들였다.

아침 저녁 분무기로 톱밥에 물을 뿌려 주었고, 제 밥그릇에 있는 밥풀을 몇 알 떼어서 통 안에 넣어주고 어느 게가 밥풀을 잘 먹나 지켜보며 즐거워했다.

학교에 다녀오면 놀이터에도 가지 않고 몇 번씩 집게들을 물 속에 담가 주며 놀았다.

세화는 집게에 대한 책을 빌려와서 큰 소리로 읽어 주기도 했다.

집게는 소라게라고도 하는데, 새우와 게의 모습을 닮은 갑각류다.

엄마, 갑각류가 뭐야? 나중에 사전 찾아봐라. 몸의 윗 부분은 단단하지만, 아랫 부분은 말랑말랑하다.

약한 뱃살을 보호하지 못하면 죽는다.

이건 사람도 그렇잖아 엄마. 배를 보호하기 위해서 고둥 껍질에 배 아랫부분을 집어넣고 집으로 삼아 끌고 다니며 산다.

달팽이 같다 그치. 고둥 껍질이 감겨 있는 방향은 오른쪽이다.

그래서 집게들의 아랫배도 모두 오른쪽으로 휘어져 있다.

엄마, 얘네들 어떻게 몸을 휘게 한 거지? 세화야 몸 꼬지 말고 계속 읽어봐. 집게들은 마음에 드는 껍질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싸우기도 한다.

"손톱만한 미물도 저마다 개성이 있더라. 세화가 집게를 두 마리 사와서 길렀는데, 성격이 너무 다른 것 있지. 한 마리는 주는 먹이를 부지런히 받아먹고 나면 재빨리 톱밥 속으로 숨기만 했어. 그런데 다른 한 마리는 왜 그런지 자꾸 통 밖으로 도망치려고만 하는 거야. 애들이 주는 먹이도 아주 조금씩만 먹고, 톱밥 속으로 잘 들어가지도 않아. 열흘 내내 미련스럽게 미끄러운 플라스틱 통을 기어오르려고만 했어. 그러다가 지치면 가만히 통 바깥을 보고 있는데, 그때는 녀석이 뭔가 생각하는 것만 같아서 기분이 이상하더라구. 제가 살던 바다로 가려는 것 같기도 하구… 아들애가 기가 막혀 하면서 그 녀석에게 빠삐용이라는 이름을 붙였어. 벌써 중학생이 되었다고 빠삐용을 다 알더라. 집게한테는 과분한 이름이지?"

빠삐용이 가늘고 뾰족한 발톱으로 벽을 긁어대는 소리는 밤에도 들렸다.

오래 전부터 남편이 늦도록 돌아오지 않는 밤이면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침대에 혼자 누워있으면 어둠 속에서 괴이한 기운이 뭉쳐서 사람의 형상이 되어 내게로 다가왔다.

음산하고 검은 기운은 아무 짓도 하지 않고 그냥 나를 물끄러미 들여다 볼 뿐이었지만, 나는 저절로 숨이 막혔고 두려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 밤이면 거실에 나와 티브이를 틀었다.

소파에 누워 티브이를 보고 있어야 조금이라도 눈을 붙일 수 있었다.

졸음이 몰려오면 리모컨을 눌러 소리가 나지 않게 하고 밤새도록 티브이를 켜놓았다.

소리를 죽인 화면 속에서 사람들은 입만 뻥긋거렸다.

나는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떻게 살아가는지 해독할 수 없었다.

밤이 깊어갈수록, 지하 수 천미터 아래 무너진 흙더미 속에 매몰되어있는 사람처럼 나는 티브이의 빛에 의지했다.

어두운 거실 한쪽에 놓인 거울을 보면, 껌벅거리는 푸르스름한 빛을 띠고 어슴프레하게 떠있는 듯한 내 몸이 혼령처럼 느껴졌다.

남편이 오지 않는 밤에만 잠이 오지 않았던 건 아니다.

남편이 잠들어 있을 때도 나는 홀로 거실을 서성였다.

밤마다 티브이를 켜놓고 소리를 죽인 채 소파에 누워 새벽을 맞이했다.

자는 것도 아니고 깨어 있는 것도 아닌 채 소파에 누워있는 나를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다.

집게를 사온 날도 남편은 연락 없이 자정을 넘기고 있었다.

나는 그 날 밤도 거실에 혼자 누워서 아무 생각 없이 거실 벽에 반사되는 푸르스름한 빛이 광도에 따라 밝아지고 어두워지는 것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그대로 내가 해체되어 작은 입자조차 남기지 않고 세상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도 같다.

어디선가 뭔가를 긁어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나는 리모컨을 눌러 티브이의 음량을 줄이려고 하다가 이미 최소한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날카로운 것으로 벽을 긁어대는 듯한 소리는 집게가 내는 것이었다.

집게는 낮에 그랬던 것처럼 쉬지 않고 플라스틱 상자를 기어오르려고 했다.

집게의 발톱이 내는 빠각거리는 소리가 머리 속을 긁어대는 것 같았다.

나는 플라스틱 통을 가볍게 건드렸다.

잠시 조용하던 통 속에서 집게는 다시 빠각거리기 시작했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발톱 소리는 멎지 않았다.

낮이든 밤이든 가리지 않고 신경을 곤두서게 하던 그 소리가, 문득 내 안으로 들어왔다.

어느 날 전화도 없이 새벽에 들어온 남편이 닷새로 예정된 출장을 떠나야하니 가방을 챙겨달라고 했다.

말끔히 다림질된 와이셔츠와 내의들을 챙겨줄 때였다.

빠삐용이 벽을 긁어대던 소리가 내 속에서 나를 긁어대기 시작했다.

빠각빠각 빠각빠각.

그러던 녀석이 어젯밤 결국 탈출하는데 성공하고야 말았다.

아침에 먹이를 주려던 세화의 비명 소리에 달려가 보니, 통 밖에 빠삐용의 고둥 껍질이 텅 비어있는 채로 거꾸로 뒤집혀 있었다.

"아침부터 두 시간 동안 이 잡듯이 뒤지느라 늦었지 뭐야. 세화가 울고 불고 난리야. 혹시라도 누가 밟으면 어쩌니.…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도 누가 자꾸 머리채를 잡아당기는 기분였어".

심각한 표정으로 듣고 있던 진희가 한숨을 쉬었다.

"어쩌다 껍질까지 떨어뜨렸을까… 통을 빠져 나온들 아파트가 더 커다란 감옥이고, 집밖으로 나간다고 해도 어디로 갈 수 있을까…".

뱃살이 드러난 빠삐용이 집안 어느 구석진 곳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죽어갈 것을 생각하니 견딜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벌써 집안에서 썩은 냄새가 나기 시작할 것만 같았다.

나는 도리질을 하며 일어섰다.

"찜질방 가자 진희야. 너랑 오랜만에 목욕하고 싶어".

목욕탕 안에는 훈훈한 김이 자욱했다 폭포처럼 쏟아지는 물소리 때문에 귀가 멍멍했다.

쌀쌀해진 날씨 탓인지 평일 낮인데도 사람이 많았다.

나는 뜨거운 물에 발을 담그고 살이 퉁퉁 불어날 때까지 기다렸다.

일주일 전에 바짝 도려낸 굳은살이 성큼 자라있었다.

살이 충분히 불어난 것을 확인한 나는 연필 깎는 칼을 꺼냈다.

굳은살 전용 면도기도 있지만 이것이 내게는 더 편했다.

칼집을 열자 숨어있던 칼날이 곧추섰다.

진희가 일어나서 비누 거품이 가득한 몸에 물을 끼얹었다.

서른 살에 이혼하고 시를 쓰면서 십 년째 혼자 고달프게 살아가는 진희의 발이 갸름하고 고운 것이 이상하게 여겨졌다.

엄마는 발이 지독하게 못생겼다.

얼굴이나 손은 그다지 밉지 않은 편인데, 발은 딸인 내가 보아도 눈살을 찌푸릴 정도였다.

웬만한 남자의 발보다 크고 넓적한 데다가, 뼈마디가 굵어서 복숭아뼈나 발가락뼈가 억세 보였다.

발가락들은 짧으면서도 뭉툭했고, 안으로 심하게 구부러져 있기까지 했다.

두꺼운 발톱들은 옆으로만 길었고 새끼 발톱은 뭉그러져 있었다.

못생긴 발을 부끄럽게 여기는 엄마가 사시사철 양말을 벗지 않아서 그런지 무좀이 심하게 걸려있었지만, 무좀보다 엄마의 못생긴 발을 결정적으로 추하게 보이게 한 것은 굳은살이었다.

엄마의 발에는 나무껍질처럼 두껍고 딱딱해 보이는 굳은살이 발뒤꿈치부터 발바닥 전체에 퍼져 있었다.

뒤꿈치에는 가뭄에 갈라진 논바닥처럼 서너 줄의 긴 고랑이 움푹 파였고. 그 속에는 양말의 실오라기나 거뭇한 때까지 박혀있었다.

엄마가 양말을 벗을 때는 굳은살을 벗겨낼 때뿐이었다.

부엌에서 몰래 굳은살을 벗기는 엄마였지만, 아버지가 안 계신 날이면 방안으로 세숫대야를 들였다.

뜨겁게 데운 물에 발을 담그고 있으면 물을 먹은 굳은살이 허옇게 일어섰다.

엄마는 하필이면 부엌칼로 굳은살을 썰어내곤 했는데,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왠지 으스스해지곤 했다.

엄마의 발을 보고난 후로 나는, 아버지가 옆 마을에 살림을 차려준 첩을 더 좋아하는 이유가 엄마의 발 때문일 거라고 믿게 되었다.

첫애를 낳고 나서 내 발에도 굳은살이 앉기 시작했다.

나는 불길한 징조를 본 것만 같아서 틈만 나면 자주 굳은살을 긁어냈다.

의사가 처방해준 연고를 열심히 바르고, 신발을 큰 것으로 바꿔 신고 발걸음까지 고쳐보려고 애썼다.

그러나 굳은살은 불사신처럼 다시 솟아났고 날이 갈수록 두꺼워졌다.

엄마의 발을 빼 닮은 나의 발 때문에, 아버지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산 엄마의 삶을 저주처럼 내림받을 것만 같아서 나는 두려웠다.

발바닥에 혈액 순환이 안돼서 그렇다는 진단이 내려졌다.

내부의 원인부터 치료해야 한다는 것이다.

혈액 순환에 도움이 된다는 약을 먹었지만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의사가 내 안에 숨어있는 질긴 핏줄까지 치료할 수는 없었다.

결국 요즘은 병원에 다니기에도 지쳐서 칼로 굳은살을 베어 내기 시작했다.

얼마전 화장실 바닥에 세숫대야를 놓고 앉아 굳은살을 베고 있는 나의 모습을 세화가 본 적이 있다.

세화는 내 옆에 쭈그리고 앉아서 한동안 말없이 보기만 하더니, 양말을 벗어 나의 발에 제 발을 갖다 대었다.

"엄마, 엄마 발은 누굴 닮았어?"

"외할머니 발".

"외할머니 발도 이래?"

"응".

"그럼 오빠 발은 아빠 발을 닮았고, 내 발은 외할머니 발을 닮은 거네. 외할머니는 누구 발을 닮은 거래?"

"몰라".

아득히 먼 할머니의 할머니의 할머니였을까.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였을까. 누가 내게 이런 유전자를 물려준 것일까. 내 발과 꼭 닮은 세화의 발 때문에 가슴이 저려서 나는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진희가 끼얹는 물에 씻겨 내려온 비누거품이 내 발치까지 흘러왔다.

진희의 굳은살 없는 뒤꿈치가 연분홍으로 물들어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목욕탕에 오면 자꾸만 남의 발을 보게 되었다.

아이들의 발은 분홍색을 띠고 보드라워 보이는데, 어른들의 발에는 거의가 굳은살이 붙어 있었다.

오래된 발일수록 어딘가 일그러져 있기도 했다.

남편이 출장을 떠난 지 일주일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정된 날을 이틀이나 넘긴 남편은 휴대폰도 받지 않고 있다.

문득 남편과 함께 있을 것 같은 그 여자의 발이 궁금해졌다.

속눈썹에 땀방울이 맺혀서 눈앞이 흐려졌다.

나는 땀을 걷어내고 입술을 깨물며 굳은살에 칼날을 댔다.

칼은 생살과 굳은살의 경계선을 찾아 줄타기를 하듯 흔들린다.

어쩐지 손끝에 정신을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한순간 손에 힘이 엇들어갔다.

순간 칼날이 생살을 저몄다.

'앗'하고 숨을 들이 마셨다.

솟아나온 피가 욕탕 바닥에 번져갔다.

멍하니 번져가는 피를 보기만 하는 나를 진희가 잡아 일으켰다.

다리를 절룩거리며 찜질방을 나와 반창고를 붙이고, 진희가 끄는대로 말없이 따라갔다.

우리는 곳곳에 개똥과 쓰레기들이 뒹구는 좁은 길을 숨차게 걸어 올라갔다.

둘이 나란히 걷기에도 좁은 길이었다.

낡은 집들의 벽에 꽤 깊은 금이 가있는 것이 여기 저기 보였다.

먼지가 낀 창문마다 녹슨 방범창들이 있었다.

시멘트 벽과 철창 때문에 집마다 제 각각 감옥인 것처럼 여겨졌다.

진희는 거의 언덕 꼭대기에 이르러서야 멈추었다.

모서리가 허물어진 시멘트 계단을 몇 칸 내려가니 은회색 알루미늄 문이 있었다.

문 하나를 사이로 골목길과 단칸방이 분리되어 있었다.

방안으로 들어섰을 때, 숨이 턱에 차고 가슴이 심하게 출렁거렸다.

나는 입을 벌리고 진희의 방을 둘러보았다.

좁은 방 한쪽 구석에 싱크대 한 칸과 소형 냉장고가 있고, 그 옆에 허름한 비키니 옷장이 놓여 있었다.

옷장 옆에 수백 권은 되어 보이는 책들이 책꽂이도 없이 쌓여 있었다.

십 년은 되었을 것 같은 찌든 벽지를 보며 진희의 생활이 이토록 곤궁했었나 싶어 아뜩해졌다.

너… 이렇게 사는 거… 괜찮니? 입술이 꿈틀거렸다.

"이렇게 살면서 말도 안 했니? 너무했어. 우리가 정말 친구긴 한 거니?"

"일부러 숨기려던 건 아냐. 여기 이사 온 지 몇 달 안돼".

진희가 태평하게 웃으며 대답했지만 내 마음은 편치 않았다.

"너무 그런 얼굴 하지마. 이렇게 사는 게 어떤 건데? 나 잘 살고 있으니까 걱정마".

그래도 내 얼굴이 풀리지 않자 진희가 일어나서 찻잔을 꺼내왔다.

"네가 마음 아파할 만큼 고생하지 않아. 시집은 안 팔리지만, 번역료는 좀 돼. 우유 배달해서 버는 돈도 괜찮고. 또, 또… 뭘 그렇게 상을 찡그리니? 너처럼 번듯한 아파트에서 예쁘게 꾸며놓고 사는 것만 잘 사는 건 아니잖아. 너도 뭔지 속상한 일이 있는 것 같은데 뭐. 목욕탕에서도 그렇구… 솔직히 아까 처음 보았을 때 네 목소리가 어땠는지 알아? 박제된 나비의 날개처럼 위태롭게 느껴졌어. 녹차 줄게 기다려".

진희가 물을 끓여서 방으로 들여왔다.

나는 이불을 둘러쓰고 연한 초록빛이 도는 액체를 조금 마셨다.

따스하고 그윽한 향이 마음을 편하게 해 주었다.

방바닥이 조금 미지근해졌지만 냉기가 가시려면 한참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거리를 휘돌고 있는 사나운 바람이 열린 문틈으로 밀려 들어와서 알루미늄 문이 덜컹거렸다.

"난방을 켰으니까 조금 있으면 나아질 거야".

진희도 이불 속으로 발을 밀어 넣었다.

"이젠 요즘 너 사는 얘기를 해 봐".

진희의 눈길이 내게서 떠나지 않았다.

남편에게 다른 여자가 생긴 것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일 년 전부터였다.

동업 관계에 있다는 한 여자에게서 스킨과 와이셔츠와 넥타이들을 선물 받아 오더니, 속내의까지 들고 오기 시작했다.

둘의 사이를 의심하자, 남편은 순전히 동업 관계 때문에 만나는 사람이라고 했다.

다시는 의심하지 마. 믿지 못하면 사랑은 무너지는 거고, 사랑이 없는 가정은 깨지는 거야. 꾸짖는 듯한 남편의 표정 앞에서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 후로 남편은 더 당당하게 그 여자를 만나고 다녔다.

여자는 남편에게 묻혀 들어오는 향수로, 넥타이와 허리띠와 속옷 선물들로 나를 끊임없이 건드렸다.

어느 날 새벽에 돌아온 남편에게서 술 냄새보다 여자의 향수 냄새가 진하게 났다.

나는 좀 더 강하게 남편에게 추궁했다.

남편은 무섭게 화를 냈다.

계속 의심만 하는 당신이 역겨워. 내가 뭘 잘못했니? 생활비를 안 줬어, 밖에서 애를 낳았어? 우리가 수상한 짓 하는 것 봤어? 막말로 난 초혼이었고 넌 내가 두 번째잖아. 설령 내가 다른 여자를 사귀어도 넌 따질 자격이 없어.

당장이라도 씹던 껌을 뱉을 듯한 표정이었다.

그의 표정을 보며, 남편에게 나와 아이들은 더 이상 달콤한 그 무엇이 아니라는 것을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몸이 덜덜 떨렸지만, 나는 입을 다물었다.

남편의 출장이 점점 많아지고, 접대용 골프 시간이 늘어나고, 이유 없는 외박이 잦아졌다.

석 달 전 엄마에게 찾아가 참았던 울분을 터트리자, 엄마는 슬픈 표정으로 맥없이 말했다.

"억지로… 참지 않아도… 될 게다.

세상이 많이 변했으니까. 그렇지만 얘들이… 무슨 죄가 있겠니…".

엄마의 눈길은 우리 네 식구가 함께 웃고 있는 사진을 더듬고 있었다.

남편은 나의 어깨를 짚고 있었고 사진 속의 아이들은 함박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눈물 때문에 세화가 들고 있는 빨간 풍선이 어룽거렸다.

터지면 다시 살 수 있는 풍선이 부러웠다.

나는 엄마와 함께 사진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엄마가 눈물을 찍으며 나를 보았다.

"미안하다.

내가 어떻게 말해주지를 못해서… 네 아버지를 겪었으면서도, 사람 드레질도 제대로 못하고 덥석 결혼시켜서… 그래도 이 사람은 의처증도 없구… 널 때리지도 않잖니. 이번에는 애들도 있는데, 어쩌겠니…".

"됐어 엄마, 내가 오해한 건지도 모르구. 그래도 엄마가 이뻐한 사윈데, 설마 정말로 계속 나쁜 짓 할라구… 내가 너무 성급했나봐. 어떻게 참고 기다려보지 뭐… 걱정하지마".

나는 일부러 기운찬 목소리로 엄마를 위로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남편이 처음 집에 찾아와 결혼 얘기를 꺼냈을 때, 엄마는 초면의 사윗감 손을 덥석 잡으며 기뻐했다.

한 번 깨진 그릇이라 아무도 거둘 사람이 없을 줄 알았다고, 하마터면 주책 맞게 소리내서 말할 뻔했노라고 엄마는 훗날 나에게 그날의 감격을 여러 번 되풀이하곤 했다.

한 번 이혼한 여자, 어느 총각이 데려가겠니. 그러니 잘해줘라, 웬만한 건 다 덮어주고… 사위에 대한 대접이 유난히 각별했던 엄마였다.

뇌리에 맴도는 그 여자의 냄새를 없애기 위해, 나는 날마다 이불과 침대 시트를 빨고 집 안 어디에도 먼지하나 없도록 하루종일 걸레질을 했다.

레이스가 달린 화려한 커튼을 사서 침실과 집안을 꾸미고, 수납할 곳이 없을 정도로 많은 형형색색의 그릇들을 사들였다.

어쩌다 함께 식사를 하게 되는 날이면 남편에게는 최고급의 그릇에 음식을 담아 주었다.

크고 작은 냄비들을 꺼내놓고 수세미에 세제를 묻혀 냄비들이 마술 램프이기나 한 것처럼 윤이 나도록 닦기도 했다.

손끝에 힘을 주어 문지르면서 그의 사업이 동업을 할 필요가 없도록 자리잡기를 바랐고, 그 여자가 제발 떠나가라고 주문을 외웠다.

차라리 그 여자가 죽어버리기를, 이혼이라는 과정을 다시는 겪지 않게 해 주기를, 남편에게 내가 다시 달콤한 그 무엇이 되게 해 주기를 빌었다.

그 여자가 선물한 것들을 남편 몰래 쓰레기통에 버리고, 향수 냄새를 묻혀온 와이셔츠들을 찢어 버렸다.

남편은 물건들이 없어진 것을 알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의 침묵이 무서웠지만, 침묵을 깨는 것이 더 겁이 났다.

"뭐가 그렇게 두렵니?"

진희의 눈이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처럼 나를 향했다.

나는 아득한 마음으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얼룩진 벽지에 곰팡이가 피어 있는 것이 보였다.

남편의 마음을 비집고 다른 여자가 스며들 듯이, 빗물이 벽의 보이지 않는 틈을 타고 내려왔으리라. 습기는 서서히 벽지 속으로 침투하고, 결합되어 있던 분자와 분자의 틈을 벌려가며 야금야금 잠식했으리라.

진희야, 내가 뭘 두려워하는 거냐고… 아직 이야기하지 못한 게 많아. 너는 우리 엄마의 발을 몰라. 외할머니는 엄마가 짐을 싸들고 갈 때마다 냉수 한 잔 없이 돌려보내곤 했지. 저녁때가 되어 집집마다 불을 켤 때도 엄마는 집에 들어가지 않았지. 밤이 되면 어둠은 나무로 시커멓게 몰려들어. 나무 아래 짙게 고인 어둠 속에 앉아 불이 꺼져 있는 우리 집을 보며 쭈그리고 앉아 울던 엄마… 엄마가 내 손을 놓을까봐 어린 나는 무서웠어. 나를 놓고 어디론가 사라질까봐, 잡은 손을 놓치지 않으려고 한사코 매달리곤 했지. 뭘 두려워하느냐고? 나도 잘 모르겠어… 나는 이불에 고개를 묻고 소리 없이 울었다.

"집게가 껍질을 쓰고 다니는 이유가 약한 배 때문이라고 했지?"

진희가 난데없이 물었다.

나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여 주었다.

진희가 씁쓰름한 미소를 지었다.

"제법 영리하구나. 고둥 껍질에 몸을 맞추려고 허리 아래를 뒤틀기까지 하다니…".

진희가 밥상 위의 책을 집어들었다.

"내가 요즘 그리스 신화를 번역하고 있는데, 너한테 얘기해 주고 싶은 신화가 있어. 들어봐".

방안에 잠시동안 침묵이 흘렀다.

책장 넘기는 소리만이 사각사각 들려왔다.

오래 전 함께 가곤 했던 학교 옆의 작은 카페가 생각났다.

그때도 우리는 곧잘 이렇게 무릎을 맞대고 있었다.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여러 가지 고민들을 털어놓기도 했고, 금지된 책들을 돌려보며 토론하기도 했다.

세상의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이야기했고, 우리가 흘러가게 될 미지의 삶을 넘겨보곤 했다.

주부가 된다는 것은 기다리는 것에 길들여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두워지면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아이가 태어나기를 기다리고, 아이들이 빨리 자라기를 기다렸다.

요즘 나는 도대체 뭘 기다리고 사는지 모르고 살아간다.

세월을 성글게 건너뛰고 싶기도 하고, 무한히 늘리고도 싶은 모순된 감정을 지닌 채 그저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내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렇지만, 시간이란 생략할 수도 덧붙일 수도 없는 걸음이다.

조금이라도 빨리 하거나 도망갈 수 없는, 딱 한 걸음씩만 디디게 되어있는 끝없이 긴 길이다.

남편이 함께 저녁을 먹는 날이 드물어지면서, 내 앞에 놓여진 미래란 수많은 감자 껍질과 콩나물 부스러기들과 차갑게 식은 밥들로 만들어진 무덤일 거라고, 나는 자주 생각했다.

진희가 책을 뒤적이다가 밑줄이 길게 그어져 있는 곳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제우스는 인간계의 많은 여성들과 바람을 피워. 그런데 진짜 신의 모습을 한 제우스를 정면으로 본 인간은 딱 한 명, 왕녀 세멜레뿐이야. 세멜레가 제우스의 아기를 잉태하자, 헤라가 세멜레에게 속닥거렸지. 진짜 제우스인지 어떻게 믿을 수 있냐, 휘황찬란한 신의 모습을 보여달라고 요구해라, 제우스가 정말로 당신을 사랑한다면 당신에게 증거를 보여 주는 게 당연하지 않냐. 그 말을 듣고 세멜레는 제우스에게 참모습을 보여달라고 했어. 그런데 신들의 세계에서와 똑같은 모습을 하고 나타난 제우스를 보자마자 세멜레는 즉사했어. 여러 출판사의 책을 뒤져보았더니 책마다 죽은 이유에 대한 설명이 다르더라. 제우스가 번개의 신이기 때문에 타죽었다고도 되어 있고, 무서워서 겁에 질려 죽었다고도 했고, 신의 광휘를 인간이 견딜 수 없어서 죽었다는 구절도 있어. 오싹한 기분이 들더라. 나는 이 신화에서 영감을 받아 시를 몇 편 쓰기도 했어. 요즘은 그리스에 직접 가보고 싶어서 미칠 지경이야. 그래서 월세를 적게 내는 이 곳으로 이사를 왔지. 아침에는 우유 배달을 하고, 오후에는 서적 대여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해. 돈이 모이면 그리스에 가서 희랍어를 공부할 거야. 집게 얘기를 들으면서 이 신화가 떠오르더라. 살기 위해 우리도 평생 집게처럼 껍질을 쓰고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진실을 보면 인간은 정말 파멸할 수밖에 없는 건가?"

세멜레가 나의 처지에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진희야… 나는 어쩌면 좋으니… 눈과 귀를 가리고, 본 것을 못 보았다고 우기면서… 남편의 진실이 나는 무서워… 차라리 남편의 거짓에 기대고 싶어… .

입이 저절로 일그러지면서 바짝 마른 입술이 튿어졌다.

마른 나무껍질처럼 거스러미가 일어났다.

나의 영혼까지 들여다보려는 듯한 진희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그리스에 다녀오면?"

"다녀오면… 난 걱정 안 해. 몸만 건강하면 어디든 일할 곳은 있어. 네가 사는 아파트 청소부로 일할 수도 있겠지. 그것도 나쁘진 않아. 그럼 날마다 네 얼굴도 볼 수 있어 좋겠다.

후후…".

"그러다가 병들면?"

"나도 이혼하고 혼자 살면서 힘들 때가 많았어. 그 중에 아플 때가 제일 서럽더라. 언젠가 이런 생각을 했지. 죽음은 살아 있는 것들의 숙명이다.

병에 걸려 죽게 되면 죽을 뿐이다, 그렇게 생각했더니 조금은 강해지더라".

진희는 남은 녹차를 마시며 설핏 웃었다.

진희의 눈빛이 어두운 밤의 반딧불처럼 신비한 빛을 냈다.

자그마한 체구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알 수 없었다.

진희가 다시 책장을 넘겨 술을 마시는 사람들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죽은 세멜레의 뱃속에 있던 아기는 제우스가 살려냈어. 그런데 그 아기는 소년 시절에 미쳐서 방랑하다가 주신(酒神) 디오니소스가 돼. 그의 신도들은 행동이 너무 파격적이었어. 술에 취해서 대낮에 벌거벗은 채로 돌아다녔대. 자유와 광기와 야성이 뒤범벅이 되었지. 국왕이었던 펜테우스는 디오니소스를 추방하려고 하다가 디오니소스 신앙에 빠진 친어머니와 이모들에게 잡혀서 토막토막 잘려서 비참하게 죽어. 아무도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광기인지 대답할 수 없는 혼돈으로 가득한 세상이었을 거야. 도대체 세멜레와 디오니소스 두 모자가 본 것이 무엇이었을까. 요즘 나는 내가 진실을 대면할 수 있는 한계가 어디까지일까 생각하곤 했어. 네 얘기를 들으니 더욱 그런 생각이 나는구나".

나는 이불에 얼굴을 묻고 눈을 감았다.

문 밖에서 바람이 좁은 골목을 휩쓸고 지나갔다.

어느 집 문이 큰 소리를 내며 닫혔다.

가파른 골목길에 양은 그릇 같은 것이 떨어져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시간이 흐를수록 바람이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나는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빠삐용이 떠올랐다.

껍질이 벗겨져 아랫배의 속살이 드러나 버린 참담한 모습이었다.

제 몸의 스무 배도 넘는 높이를 넘어서서 밖으로 나가는데 성공하던 어느 한 순간, 어쩔 겨를도 없이 무거운 껍질이 벗겨져 떨어졌으리라. 껍질을 되찾기에는 너무 마음이 급해서 맨 몸으로 바다를 향해 나섰으리라. 바람 가득한 거리를 헤매고 있을 벌거벗은 집게가 보일 듯했다.

어쩐지 벌써 바다에 가 있을 것도 같았다.

그는 바다에 가서 무엇을 할 것인가.

어깨에 진희의 따스한 손이 느껴졌다.

"나하고 같이 가자".

나는 고개를 들었다.

눈물 때문에 진희의 얼굴이 희미하게 보였다.

"잠시 떠나있는 것도 괜찮을 거야. 몇 년 공부하다가 돌아오면 애들도 부쩍 커있을 거고. 애들은 네 생각보다 강할 거야".

내 가슴에 뭔가 울컥하고 차올랐다.

에게해와 지중해와 신들의 나라… 올림푸스 산과 폐허가 된 신전들… 거기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진희야, 나… 너처럼 강하지 않아. 너나 세멜레라면 나처럼 살지 않을 테지만… 나는.… 아이들은… 뒤엉킨 말들이 거품처럼 부글거렸다.

진희가 나를 끌어안았다.

"많이 힘들 거야. 나도 힘든 걸. 그래도… 가자".

바람이 알루미늄 문짝의 좁은 틈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창문틀과 문짝이 와락와락 흔들렸다.

골목길을 떠도는 바람이 귀신 울음소리를 냈다.

나는 이불을 어깨에 눌러 덮고 몸을 오그리며 울었다.

전남편에게 매를 맞고 화장실에 쭈그리고 앉아 목에 걸린 울음을 꿀럭꿀럭 넘길 때처럼 목이 쓰렸다.

아이가 생기기 전에 갈라서야겠다고 결심하며 울던 울음이 아직도 남아 있다가, 좁은 목줄기를 타고 함께 넘어왔다.

빠삐용을 찾는다고 법석을 떨던 아이들은 늦은 저녁을 먹고 잠이 들었다.

잠든 아이들의 평화로운 숨소리가 서러웠다.

숨쉬는 가슴 언저리의 이불이 가볍게 들먹였다.

이불 밖으로 내밀어져 있는 세화의 발을 덮어주는데 가슴이 먹먹해져왔다.

나는 아이들의 방문을 닫고 거실로 나왔다.

집안은 태풍의 기습이라도 받은 듯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다.

싱크대 속에 있던 양념 그릇들도 꺼내져 있고 거실장과 소파와 침대들도 제자리에서 어긋나 삐딱하게 놓여져 있다.

줄맞춰 나란히 있던 화분들도 어수선하게 흩어져 있다.

친숙하던 살림들이 낯설어 보였다.

문득 아까 다 깎아 내지 못한 발꿈치가 가려워졌다.

상처에 붙인 반창고를 떼어내니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나는 화장실로 가서 세숫대야에 뜨거운 물을 받아 발을 담갔다.

칼을 목욕탕에 두고 온 것이 기억났다.

발꿈치의 상처가 벌어지면서 다시 피가 비집고 나왔다.

붉은 피가 물에 섞여들며 조금씩 번져갔다.

나는 피가 흐르는 나의 못생긴 발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어디선가 피비린내가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조금 가라앉아 가던 마음이 다시 일렁이기 시작했다.

코와 입 가장자리에서 흘러나오던 피를 눈물과 함께 삼키던 오래 전의 일이 떠올랐다.

이제는 잊었다고 여겼던 비참했던 심정이 생생하게 살아났다.

세화의 발은 원시인의 발처럼 두꺼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보드라운 발보다 못을 밟아도 끄덕 없는 두꺼운 발, 겨울에 얼음 위를 걸어도 동상에 걸리지 않고, 웬만한 가시나 돌멩이에도 상처받지 않는 발을 세화에게 주고 싶었다.

칼로 잘라내야 하는 것은 못생긴 발에 돋아나는 굳은살이 아니라 족쇄처럼 나를 옭아매던 알 수 없는 손아귀였다.

나는 화장실 바닥에 놓여있는 비누곽을 바라 보았다.

비누곽 속에는 굳은살을 밀어내는 경석이 들어있다.

경석을 집어들자 그 자리에 동그랗게 웅크리고 있는 작고 검붉은 점이 보였다.

빠삐용이었다.

화장실도 여러 번 뒤졌지만, 아무도 비눗갑 속에 있는 경석까지 들춰보지는 못했다.

돌멩이로 녀석을 건드려 보았다.

그는 죽어 있었다.

빠삐용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자세히 살펴보았다.

긴 다리들은 안으로 말려들어 오그라붙었고, 새까만 몸통 아래로 퇴색한 분홍색 살점이 늘어져 있었다.

뱃살은 하루종일 계속 되었을 시련 때문에 상처투성이였다.

상처 부위가 가장 빠르게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바다로 가고 싶어 밤새도록 빠각거리던 발톱들은 이제 조용했다.

어제 밤에도 빠삐용이 내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왔었다.

빠각빠각 빠각빠각. 날카로운 소리가 신경을 긁었다.

나는 푸르스름한 광선에 얼비치는 플라스틱 통을 열었다.

빠삐용은 멈칫했다가 금세 다시 벽을 긁었다.

손가락을 살며시 통 안으로 집어 넣었다.

동그란 소라고둥을 건드리자 빠삐용이 껍질 속으로 웅크렸다.

손가락으로 조금씩 빠삐용을 밀어 올렸다.

마침내 높은 담장의 꼭대기에 빠삐용이 올라섰다.

나는 손가락 끝에 아주 조금 힘을 주었다.

툭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소파에 누워서 이내 깊이 잠들었다.

아침에 보니 녀석은 껍질을 버리고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갑작스럽게 증오심이 솟아올랐다.

어쨌든 살아내기를 바랐었는데, 단 하루도 살아남지 못할 정도로 나약하다니. 이따위 바보 같은 녀석은 구더기의 밥이 되도록 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나는 녀석을 변기로 집어던지려고 벌떡 일어났다.

나의 모습이 거울에 비쳤다.

거울 속에는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은 눈빛을 가진 내가 있었다.

누구에게도 보이지 못했던 표정이었다.

의처증에 걸린 전남편에게 수시로 맞으면서도 두려움과 고통으로만 연연했던 얼굴이었다.

못생긴 발을 탓하며 양말로 숨기면서 체념하기만 하던 엄마에게도 이토록 광적인 적개심은 생기지 않았었다.

나는 베란다로 달려나가서 창을 열고 창 밖으로 경석을 멀리 던졌다.

습기찬 바람이 휘몰아쳐 커튼이 소리를 내며 펄럭였다.

바람에 온 몸이 휩싸이자, 천막을 지고 겨울 벌판을 유랑하는 집시가 된 듯했다.

바람이 집안을 멋대로 헤집고 다녔다.

발에 거치적거리는 화분을 발로 밀었다.

그러려던 것은 아닌데, 화분이 뒹굴며 흙을 쏟았다.

화분을 세우려다가 그만두고 창문들을 더 활짝 열었다.

바람이 커다랗게 날개를 펼치며 나를 거칠게 밀어붙였다.

뭐가 그렇게 두렵냐고 묻던 진희의 음성이 이명처럼 들렸다.

나는 베란다 창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나무들이 어디론가 달려갈 듯 머리채를 휘두르며 낙엽을 마구 떨궜다.

나는 두 팔을 벌려 바람을 받았다.

디오니소스의 신도인양 가슴속에 미칠 듯한 광기가 휘돌았다.

손바닥에 쥐고 있던 빠삐용의 주검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그토록 바다로 가고 싶어하던 녀석이다.

진희가 보여주었던 사진 속의 지중해와 에게해는 눈이 시리게 푸르렀다.

쓰디쓴 약을 먹듯이 녀석을 삼킬 수만 있다면, 그래서 이 녀석과 내가 하나가 될 수만 있다면, 이 녀석의 영혼이 내 안에서 끊임없이 빠각거려 준다면, 나는 어쩌면 녀석과 함께 바다로 갈 수도 있으리라.

죽은 집게의 영혼이 옮겨온 듯, 벌거벗은 채 집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으로 온 몸이 떨려왔다.

나는 발작적으로 입 속에 죽은 집게를 털어넣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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