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의 'abuse'는 우리 문화의 중요한 특징을 말해주는 것 같아 흥미롭다.
이 단어는 여러 가지 뜻을 지니고 있으나 그중 '남용'과 '학대'라는 의미가 각별한 뉘앙스로 다가온다.
무생명체를 목적어로 가질 때는 '남용' '오용'이라는 뜻이지만, 사람.동물 등 생명체가 목적어일 때는 '학대' '모욕' 등의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주위를 돌아보면 이런 두 가지의 의미로 풀이될 수 있는 일들이 그야말로 다반사다.
심지어 남용의 경우 무생명체뿐 아니라 권력.기업 등에도 두드러지고 있으며, 남용이 남용을 낳고, 그 남용이 또 남용을 낳는 '기막힌 악순환'이 거듭되고 있는 느낌이다.
▲'학대'는 그 정도가 훨씬 심각하다.
가부장적 가치관이 판을 치던 과거에는 아내 학대가 사회의 큰 문제였다.
하지만 학대의 양상은 이제 다양하기 이를 데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성들의 경제적인 능력과 사회적인 지위가 향상되면서 남편 학대가 심심찮게 부각되고 있다.
특히 아동.부모.노인 학대 사례들이 잇따라 신문 지면과 방송 화면을 장식하고 있으며, 가정 붕괴도 부쩍 늘고 있다.
▲가톨릭대 의대 신경정신과 채정호 교수팀은 '과거의 충격이 뇌의 기능 자체를 변화시킨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해 주목되고 있다.
정신적 충격이 심하면 전두엽에 혈액이 적게 공급되는 반면 번연계의 기능은 지나치게 활성화돼 '과도한 각성상태'에 빠지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따라서 이런 사람들은 회복이 돼도 평생 그 공포에서 못 벗어나 가정과 사회에서 정상 생활을 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최근 미군들에게 심한 학대와 모욕을 당한 한 이라크인이 '창피해서 고향에 못 가겠다'고 말한 사실이 보도됐다.
어쩌면 그는 군인이 지나가기만 해도 소스라치고, 악몽에서 평생 자유로울 수 없게 될는지도 모른다.
당시의 공포감이 뇌에 뚜렷한 물리적 손상을 가했기 때문이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이 아닌 평상시에도 우리 사회에서는 갖가지 극심한 학대가 빈발하고 있지만, 아직도 학대나 모욕을 범죄로 인식하지 않는 분위기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는 약물 남용이 세계 최고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지만, 정치 권력이나 노사 문제를 싸고도 남용이 남용을 낳는 악순환이 거듭돼 왔다.
그런가 하면, 학대 문제는 날이 갈수록 확산되고 있어 우리 사회의 마지막 보루처럼 여겨졌던 가정마저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붕괴 국면으로 치닫고 있는 판이다.
가정과 가족 간의 소외로 도시 사람들은 애완동물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니 기가 막힌다.
얼마 남지 않은 '가정의 달'에 깊이 자성해야할 문제들이 아닐 수 없다.
이태수 논설위원
댓글 많은 뉴스
나경원 "李 장남 결혼, 비공개라며 계좌는 왜?…위선·기만"
이 대통령 지지율 58.6%…부정 평가 34.2%
李대통령, 대북전단 살포 예방·사후처벌 대책 지시
대통령실 "국민추천제, 7만4천건 접수"…장·차관 추천 오늘 마감
김기현 "'문재인의 남자' 탁현민, 국회직 임명 철회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