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상처를 완전히 치유할 수는 없다. 시간과 더불어 통증은 사라지지만 그 후유증은 몸 속 곳곳에 스며있다. 상흔을 바라보면 과거의 아픔은 곧바로 살아난다. 1987년 12월은 내 삶의 방향을 바꿔버렸다.
그해 12월 10일 민주교육전국교사협의회 포항 영일지구 창립 집회가 경찰의 바리케이드를 뚫고 죽도성당에서 열렸다. 나와 김종인 선생님이 창립공동회장이 되었다. 행사를 마치고 나서 가진 뒷풀이를 잊을 수 없다. 작고하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인 채광석 선생님이 서울서 오셨고, 대구에서는 배창환, 정도원, 정만진 선생님 등 여러분이 참석하였다. 우리는 바닷가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며 채광석 선생님의 걸죽한 육자배기를 안주삼아 이 땅의 정치, 교육 민주화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나는 이 일로 당시 하늘에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권세를 가지고 있던 포철학원 이사장 박태준씨에 의해 88년 1월 31일자로 해직되었다. 갈 곳이 없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듯이 내가 갈 곳은 학생과 칠판과 꿈이 있는 교실뿐이었다. 이렇게 학원에 발을 디딘지 벌써 16년이 흘렀다. 학원가에서 나는 열심히 가르치는 선생이 되려고 노력했다. 학생이 있는 곳이면 공교육, 사교육 같은 구분은 의미가 없다고 스스로를 합리화하면서 열심히 노력했다. 그 때 같이 고뇌하던 전교조 일세대들은 이미 40대 후반 50대가 되어 운동 일선에서 한 발 뒤로 물러선 위치에 있다.
학원은 학교와 달랐다. 절대로 사람을 그냥 부리는 법이 없었다. 부린 만큼 경제적 보상을 해 주었다. 학원은 철저하게 능력을 중시하는 집단이었다. 직장의 살벌한 분위기, 강사 상호간의 지나친 경쟁의식 등은 능력 중시 풍조가 낳은 부작용이었다. 나는 여기에서 살아남기 위해 정말로 열심히 노력했다. 학원은 7월 말에 대개 열흘 정도의 여름휴가를 가진다. 나는 남들이 바다로 산으로 갈 때 여관방을 얻어 놓고 미숫가루로 끼니를 때우며 하루 18시간 씩 2학기 교재 연구를 했다. 최고가 되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노력한 만큼 인정을 받았다. 학교에 있을 때 나름대로 열심히 가르치려고 노력했지만, 학원에서 만큼은 노력을 하지 않았던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방금 이야기 한 부분에 우리 교육의 문제점과 해결 방안이 다 들어있다고 생각한다. 교육 당국은 열심히 노력하는 교사에게는 충분한 경제적 보상을 해 주는 법적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교사는 열정적으로 연구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많은 사람이 말한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돌아오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맞는 말이다. 보상이 없으니 노력하는 사람이 적고, 그러다 보니 공교육 붕괴 현상이 심화되는 악순환이 되풀이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같이 노력해야 한다. 교육 당국은 교사의 사회·경제적 지위 향상을 위해 특단의 대책을 세우고 교사는 잘 가르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각오를 새롭게 해야 한다.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획일적 평등주의와 교육정책의 예측불가능성은 사교육을 창궐하게 하는 토대이다. 이제 전교조는 획일적 평등주의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 교실에 수학 100점에서 10을 받는 학생을 같이 앉혀서 수업을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둘 다에게 고문을 하는 것과 같다. 한 쪽은 수업이 한없이 지루하고 한 쪽은 어떤 경우든 이해가 되지 않으니 수업 시간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누구나 짐작을 할 수 있다. 잘하는 학생은 따로 모아 더 수준 높은 내용으로 수업을 해야 하며, 성취도가 낮은 학생은 기초부터 다시 설명하여 배우는 기쁨을 맛보게 해야 한다. 획일적 평등주의는 계층이동을 가로 막는다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학습과 관련된 모든 것을 학교에서 해결하던 과거에는 가난한 수재가 열심히 공부하여 자신의 계층을 의지대로 이동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학습의 상당 부분을 사교육에 의존하고 있는 지금은 학원에 갈 경제적 여건이 안 되는 학생은 처음부터 의지가 꺾여 버리게 되고 가진 자들은 끼리끼리 정보를 독점하며 계속 기득권을 유지하게 된다.
우리는 간혹 자신을 냉정하게 객관화시키는 작업이 필요하다. 학원은 학생들을 상대로 강의평가를 하게하고 평점이 나쁘면 인사적, 경제적으로 불이익을 준다. 학교에 그런 제도를 도입하자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마음은 그런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가르치지 않으면 교단을 떠나겠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교단이 앞장서서 이런 문제를 연구하지 않으면 타의에 의해 이런 제도가 도입될 가능성이 많고 장기적으로는 자본의 논리에 의해 교사도 대학처럼 계약제로 갈 가능성을 배제할 수가 없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순수한 마음과 순수한 열정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전교조가 보수 기득권자들로부터 많은 음해와 공격을 받고 있지만 추구하는 이념 자체는 그 누구도 시비를 걸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일은 순수한 열정, 도덕적 순결성만으로 버티어 내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전교조의 경쟁력은 순수한 열정과 떳떳한 도덕성이다. 개인적 혹은 집단적으로 교육 운동에 처음 발을 내디디던 그 때의 순수함이 아직도 유지되고 있는가를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끊임없이 자기를 객관화하며 초발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배우는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무엇을 간절히 소망하고 있는가를 통찰하고 그것을 충족시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야 한다. 이렇게 할 때 학부모는 우리 편이 되고 우리는 당당하게 우리의 요구를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학교 밖에 있는 실패한 교사에게 교육 운동 동지적 입장에서 한마디 애정 어린 충고를 하라면 나는 거듭 이 점을 강조할 수밖에 없다. 전교조는 학생과 학부모가 간절히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귀를 기울이며 끊임없이 초발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송원학원 진학지도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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