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가을을 만나는 영화-(2)화제작편

2004년 영화 시장은 유난히 '외화'들에게 냉혹한 한해였다.

올 초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가 잇따라 전국 관객 1천만 명을 돌파하자 모든 관객들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한국영화에 집중되었고, 상대적으로 '외화'들은 소외될 수밖에 없었던 것.

하지만 가을 극장가는 사정이 다르다.

그동안 관심을 끌었던 외화들이 대거 가을 나들이에 나선다.

또 외화의 총공세에 맞서는 한국영화도 많아 이번 가을은 화제작들의 잔치인 셈이다.

◇2046

올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상영된 '2046'(15일 개봉)은 왕자웨이(왕가위) 감독이 '화양연화' 이후 4년 만에 내놓은 전작의 속편이다.

전작에서 초우와 수리첸이란 두 인물의 가슴 시린 사랑이야기를 펼쳐놓았던 왕자웨이는 '2046'에서도 "사랑은 타이밍이 중요하다"며 후회와 미련뿐인 러브스토리를 펼쳐보인다.

사랑의 상처와 추억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인 셈. "사랑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비정전'에서 '화양연화'까지 왕 감독 최근의 영화가 사랑의 행위와 과정을 보여줬다면, '2046'에서는 다양한 사랑을 보여주며 사랑이 무엇일까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화양연화'에서 자신의 비밀을 묻고 돌아온 초우는 수리첸과의 추억이 서린 호텔의 2046호를 찾는다.

하지만 이미 그 방에는 다른 여인이 머물고 있어 할 수 없이 2047호에 투숙한 초우는 그곳에서 여러 여인을 만나게 된다.

실패한 사랑의 아픈 기억 때문에 마음을 닫아버린 초우로 변신한 량차오웨이(양조위)의 쓸쓸하고 담담한 연기는 이 영화 최고의 하이라이트. 128분, 18세 이상 관람가.

◇21 그램

"영혼은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무게는?" 영화 '21 그램'(21일 개봉)은 사람이 죽는 순간 몸무게가 21g 가벼워지는데 그것이 영혼의 무게라고 가정하며 시작한다.

지난해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화제작으로 선정되기도 한 이 영화는 멕시코의 신인감독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의 무한한 가능성을 타진한 작품.

영화는 인간의 나약함과 무력감, 인생의 덧없음을 때로는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담배 연기처럼, 때로는 묵직한 진혼곡처럼 풀어나갔다.

이 영화는 독특한 스타일과 주제만큼이나 명배우들의 연기 대결이 눈길을 끈다.

숀 펜, 나오미 와츠, 베네치오 델 토로 등 이름의 무게만으로도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 이들 세 연기자는 삼각 대형의 구도를 팽팽하게 유지하며 관객의 몰입을 이끈다.

분노와 슬픔으로 점철된 이들의 연기는 너무 생생해 섬뜩할 정도. 125분, 18세 이상 관람가.

◇비포 선셋

지난 1995년 '비포 선라이즈'에서 미국 청년 제시(에단 호크)와 프랑스 여인 셀린느(줄리 델피)는 우연히 기차에서 만나 달콤한 하룻밤을 보내고 6개월 후를 기약하며 '쿨'하게 헤어졌다.

'6개월 뒤 그들은 재회했을까?' 9년이 흐른 뒤에야 그 궁금증이 풀리게 됐다.

속편인 '비포 선셋'(22일 개봉)은 현실의 시간의 흐름대로 그들은 6개월 뒤가 아닌 9년 후 파리에서 다시 만난다.

제시의 기억 덕에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의 청순함이 묻어있는 전편이 살짝살짝 스쳐간다.

이제는 청순함 대신 원숙함이라는 세월의 무게가 엿보이지만.

9년 만에 만난 탓인지 두 사람은 쉴 새 없이 떠들어댄다.

그렇다 보니 영화는 전편과 달리 대사의 집중력이 많이 요구된다.

영화가 시종일관 두 배우의 끊임없는 대화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관객들은 자막을 눈으로 쫓기에 숨이 가쁠 정도.

전편의 감독 리처드 링클레이터가 다시 메가폰을 잡아 특유의 서정성을 담아낸 이 영화는 또 다시 궁금증을 남기며 막을 내린다.

공항으로 가는 길에 셀린느의 아파트에 잠깐 들른 제시가 그녀의 노래를 듣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느닷없이 멈춘다.

모든 것은 관객의 상상뿐, 분명치 않은 결말이 두 사람의 또 다른 만남을 예고하는 것일까. 80분, 15세 이상 관람가.

◇콜래트럴

15일 개봉하는 '콜래트럴'은 강한 남성미가 느껴지는 선 굵은 스릴러물이다.

지하철에서 시작해 공항에서 끝나는 '히트'를 통해 새로운 누아르를 만든 마이클 만 감독과 톰 크루즈의 만남만으로도 관심을 끄는 작품.

영화는 12년째 택시 운전대를 잡고 있는 맥스(제이미 폭스)에게 어느 날 밤 말쑥한 옷차림의 승객 빈센트(톰 크루즈)가 나타나 다섯 군데 볼 일이 있어 하룻밤 택시를 전세내겠다고 제의하면서 시작한다.

그의 볼 일은 다름 아닌 청부살인. 한정된 시간과 공간에서 벌어지는 두 인물의 살인 여정이 꽤나 흡입력 있게 펼쳐진다.

영화의 주된 재미는 두 사람이 FBI나 경찰에 쫓기면서 '임무'를 하나씩 처리해 나가는 과정에서 나온다.

서로 대립적이면서도 의존적으로 두 사람의 관계가 변해가는 것도 흥미로운 부분. 게다가 처음으로 악역 연기에 도전한 톰 크루즈도 성공적으로 보인다.

선 혹은 악으로 쉽게 판단할 수 없게 만드는 이 킬러의 모습은 매력적이다.

회색으로 물들인 그의 머리색만큼이나 회색빛 카리스마가 넘친다.

120분, 15세 이상 관람가.

◇한국영화 화제작

'접속'의 신화, '텔미썸딩' 신드롬을 만들어냈던 장윤현 감독의 신작 '썸'(22일 개봉)은 네티즌들 사이에서 10월 개봉하는 영화 중 가장 보고 싶은 영화로 꼽힌 작품. 24시간 후로 자신의 죽음을 예고 받은 강력계 형사가 마약사건을 추적하며 벌이는 하루 동안의 이야기를 다룬 미스터리 액션영화다.

118분, 15세 이상 관람가.

한 해에 베를린, 베니스 양대 영화제를 석권한 김기덕 감독의 '빈집'(15일 개봉)도 화제작이다.

빈집에 갇힌 여자와 빈집을 여는 남자의 스토리인 이 작품은 단순한 이야기와 잔혹, 성폭력이 사라진 부담없는 영상으로 '과연 이것이 김기덕 영화인가'라는 의심마저 불러일으킬 정도로 대중성이 많이 가미된 영화. 하지만 작품 속에 내제된 묵직함은 세계가 왜 김기덕을 선택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88분, 15세 이상 관람가. 정욱진기자 penchok@imaeil.com사진: 영화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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