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단풍조차 제 색깔을 입지 않았는데도 첫얼음, 첫눈이다.
계절도 물러섬과 나아감에는 이렇듯 예외를 부리니 하물며 사람살이는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흥하기도 하고 망하기도 하는가 보다.
물러설 때 물러서고 나아갈 때 나아가면 흥하지만 물러설 때 나아가고 나아가야 할 때 물러서면 그건 망할 뿐이다.
남송의 충신이었던 사방득(謝枋得)이 편찬한 책 '문장궤범'에 "나아가고 물러섬에는 시세를 따르지 않는다(券舒不隨乎時)"는 글귀가 보인다.
한문공이 우낭양에게 주는 글로 자기 주장에 따라 행동하는 대장부의 태도를 말한 것이다.
권서(券舒)라는 말이 좀 어렵기는 하지만 돌돌 말았다 편다는 뜻으로 나아가고 물러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그렇지만 역시 어렵다.
이리 얽히고 저리 설켜 인맥이나 학맥, 혈맥에 부딪히면 이런저런 핑계로 나아가고 물러서는 것이 어렵다.
더욱이 바르지 못한 사람들에 에워싸여 둘레를 헤아리지 못하면 더 어려워 질 수밖에 없다.
이를 경계해서 옛시에도 " 사람에게 빠지느니 차라리 연못에 빠져라(溺于人也, 寧溺于淵)질 않았는가. 못에 빠지는 일도 위험하고 무서운데 사람에게 빠져 눈이 어두워지면 더 무서운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 사람에 빠지는 높은 양반들.
일본계 미국인 3세인 미래학자 프란시스 후쿠야마도 지적한 바가 있다.
한국을 저하시키는 원인으로는 혈연, 지연, 학연, 군연(군대의 인연), 사연(사조직 인연) 이라고. 이런 것들 때문에 어느 조직이든 구성원들 간에는 몸에 밴 윤리적 습관과 도덕적 의무감 같은 것이 약하고 서로 믿고 의지하는 신뢰감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는 법의 지배보다는 사람의 지배에 더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물론 후쿠야마의 견해를 반박하는 국내 학자들도 많다.
그러나 지배하는 사람, 그 사람이 만약 물러섬과 나아감에 서툴다면 그 조직은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는 것은 자명한 일이 아닌가.
그래서 프로기사들의 돌 던짐을 볼 때는 참 명쾌하다는 느낌이 든다.
한두 집을 다툴 때는 불꽃을 튕기지만 형세가 대충(그들 나름은 정확하지만) 정해져 어림없다면 투석한다.
그리고는 복기를 하는 모습에서 잘 잘못을 거울삼는 그들의 태도는 정말 프로답다.
상대의 실수를 기대하며 질질 끌 때는 얄밉지만 이럴 때는 물론 인기를 끌 수가 없다.
물러섬과 나아감이 명확한 것도 프로기사들의 매력중 하나가 아닌가.
그런데도 우리의 고위 공직자들은 남이 뭐라든 자리를 굳건히 지키거나 상당수가 낙하산을 타고 퇴직 후에도 유유히 좋은 자리에 안착한다니 정말 한심한 일이다.
연봉이 억대를 왔다갔다하니 숨이 절로 막힌다.
물러섬과 나아감이 어떻게 그렇게 서툰가. 그 놈의 욕심. 물론 그들의 노하우는 중요하다.
그러나 막혀 있을 때 대담히 물러나 확 트이는 길을 연다면 얼마나 좋을까. 무엇이 그리 아쉽고 물러서기 싫은 것일까. 명예? 권력? 처음의 큰웃음보다는 마지막 미소가 낫다고 미소지을 줄 알아야 하지 않는가.
법성 스님이 지은 '물러섬과 나아감'이라는 책이 있다.
선방에서 오래 공부한 후 불교의 실천화를 위해 대중운동에 헌신한 결과를 한 권의 책으로 엮은 것이다.
내용이 좀 어렵기는 하지만 참고 읽어 볼 만하다.
불교에 어느 정도 심취하거나 불교신도라 자처한다면 자신의 삶 자체로서의 불교를 스스로 실천하고 있는가를 점검하는 면에서도 매우 진지해지는 책이다.
물론 불교신도가 아니라도 한번쯤 불교가 이런 것이구나 하고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를 줄 수 있는 책이다.
그렇잖아도 요즘 불교에 대한 자성의 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다.
부처로부터 너무 먼 거리에 있지않나 하는 자성의 소리다.
그래서 부처로 돌아가자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린다.
스님은 그것이 곧 실천에 있다고 말한다.
곳곳에 스님이 직접 체험하고 경험한 불교내부의 이상한 기류들을 그침 없이 말한다.
그러면서 불교철학의 깊이 있는 공부도 별반 어려움 없이 피력하고 있다.
일반 독자들은 좀 이해가 어렵지만 그래도 괜찮다.
스님은 많은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일테면 불교 자주화 어떻게 이룰 것인가, 또는 한국불교의 현실과 전망, 불교운동의 철학적 기초 등 새롭게 해야 할 일과 이어가야 할 일들을 조목조목 나름대로 깊이 있게 들춰내고 있다.
그러면서 불교의 평화사상에 언급하며 결론적으로 불교도로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말한다.
그것은 물론 철저한 자기반성과 성찰이 계속될 때 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어느 일이나 다 마찬가지지만 말이다.
그중 한 가지가 바로 물러섬과 나아감이다.
어디로? 현실의 지평 위에서다.
소외에서 자유로, 앎과 함을 실행하며 위기위식을 의식의 위기로 이해하면 가능하다는 것이다.
물론 가능한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두 열심히 공부를 해야 한다.
공부하지 않고 물러서기 싫어하며 오직 나아가기만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어리석지 않기 위해서도 공부하는 것이 가장 최선이다.
그러나 오로지 물러서지 않기 위해 하는 공부는 엉터리가 되기 쉽다.
장자도 한마디하지 않았는가. 수명이 길면 수치가 많다고. 수치가 더 많아지기 전에 물러설 사람들은 물러서야 한다.
그래야 사는 사람들이 더 살 수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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