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달동네 둥지마저 밀려나…영세민들 '도시유랑자'로

대구 중구 남산 4동. 1990년 대구에서는 처음으로 '주거환경개선사업'을 벌여, 달동네 때를 벗었다. 99년과 2001년 두 차례 더 '현대화' 삽질에 완전 새옷을 입었다. 비 새던 낡은 단칸방은 가고, 초고층 아파트가 들어서고 있다.

이 과정에서 토박이들은 개발의 혜택은커녕 쫓겨나듯 시내 슬럼가를 떠돌며 더 못한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박순주(가명·70) 할머니. 7년→5년→2년 7개월→5개월. 지난 15년간 네 차례 모두 달동네의 2평도 안 되는 5만 원짜리 월세방을 전전했다. 5개월 전 이사 온 방은 20층짜리 아파트 공사장과 불과 100m 밖에 떨어지지 않아 하루종일 소음에 귀가 따가운 곳. 바람도 심해 공책만한 창은 비닐로, 창호지 문은 이불로 덮어 놓고 있었다. 동사무소에서 10만 원 남짓 생활비를 보조받지만 비싼 기름값 때문에 전기장판조차 제대로 틀지 않고 있다. 고혈압과 빈혈에 두 눈 모두 실핏줄이 터져 취재팀의 얼굴조차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

할머니는 "비가 새고 천장이 무너져도 비슷한 수준의 월세를 구할 곳은 이곳 밖에 없었다"며 "사는 곳도 곧 헐린다니 이제 지치고 돈도 없어 더 이상은 갈 곳이 없다"고 울음을 터뜨렸다.

남산4동과 함께 대구의 대표적 달동네로 꼽혔던 대현지구(감나무골) 영세민들 또한 사정은 마찬가지. 왼쪽 뇌에 마비가 와 장애인이 된 박성우(가명·71) 할아버지와 심장질환을 앓고 있는 부인 이민숙(가명·63) 할머니. 10년 전 감나무골 사람이 됐다.

내외가 이사 걱정으로 새까맣게 속을 태우기 시작한 건 90년대 말 대현1지구가 주거환경개선지구로 지정되면서부터. 이주비용 500만 원으로 보증금을 주고 월세 5만 원짜리 전세라도 구할 수 있는 곳은 역시 주거환경개선지구로 예정된 옆 동네 대현2지구밖에 없었다. 하지만 대현2지구 철거 기한도 이제 1년 앞으로 다가왔다.

인근 주민들은 1지구에서 2지구로 건너와 또다시 이사할 곳을 찾아야 하는 영세민들이 20가구가 넘는다고 했다.

빈곤층의 주거환경을 개선해 주겠다던 주거환경개선사업은 낡고 오래된 집들만 갉아먹은 채 영세민들을 더욱 고달픈 삶으로 내몰고 있는 것이다.

남구 이천지구 주거환경개선사업으로 2년 전 봉덕3동에 이주한 민영준(가명·54)씨 경우 빚만 300만 원으로 불어났다고 하소연했다. 초등학생 두 아들과 6만 원짜리 월세에 살았던 민씨는 3개월간 대구 전역을 돌아다녔지만 비슷한 집은 찾지 못했다. 결국 10만 원짜리 월세를 구할 수밖에 없었고 '분수'에 맞지 않는 삶을 살다 보니 빚을 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민씨는 "'없는' 사람에게 도시 재개발 사업만큼 가혹한 것은 없다"며 "막노동으로 겨우 생계를 꾸려가지만 두 아들을 돌봐야 해 마음껏 일하기도 벅찬 처지"라고 했다.

올 4월 대봉2동의 10만 원짜리 월세 2칸으로 이사 온 이행기(가명·73), 이남금(가명·72) 할머니의 시름도 깊어만 가고 있다.

1년 계약금으로 이주비용 200만 원 모두를 집주인에게 지불해 계약 기간이 끝나는 내년 4월엔 꼼짝없이 길거리로 나앉을 판. 두 할머니는 각종 재개발 때문에 "4만 원, 7만 원짜리 월세가 모두 사라져 생활이 더 어려워졌다"며 "죽지못해 산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대구에 주거환경개선사업이 뿌리를 내린 지난 15년간 공동주택(아파트) 방식의 15개 지구 주거환경개선사업이 완료됐고 12개 지구 아파트 건립 공사가 진행 중이며 내년부터는 2단계 사업으로 9개 지구가 재개발에 돌입한다.

하지만, 아파트에 입주했거나 분양을 끝낸 20개 지구 6천506가구 중 살던 곳에 재정착한 원주민은 49.0%에 그치고 있다. 결국, 51.0%에 달하는 나머지 3천326가구(1만3천여 명)가 다른 달동네를 떠돌아다니는 '도시 유랑민'으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다.

기획탐사팀=이종규·이상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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