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전경옥입니다-늙은 호박

가끔씩 가는 식당에선 사시사철 늙은 호박들을 보게 된다. 이 구석 저 구석에 펑퍼짐하니 퍼질고 앉은 호박덩이들은 정겹고 익살맞기까지 하다. 그 식당의 부엌에선 언제나 치직치직 호박지짐이 부치는 소리가 난다. 단골들의 침샘은 맹렬하게 반응하기 시작하고, 배꼽시계도 덩달아 빨리 돌아간다.

언제부터인가 호박이, 그것도 늙수그레한 호박이 점점 더 좋아진다. 반질반질 윤기 나는 애호박엔 풋풋한 어여쁨이 있지만 주름마냥 깊게 팬 골과 울룩불룩한 모양새의 늙은 호박에서는 너그러움과 여유가 느껴진다. 애호박은 연둣빛 청춘 같고, 늙은 호박은 인생의 쓴맛 단맛 다 겪으면서 안으로 푹 익은 사람 같다.

늙은 호박은 대개 뭇사람의 시선 밖에 있던 것들이다. 풀밭 속에 묻혀졌거나 호박잎에 가려져 있다가 늙어버린 것들. 땡볕과 소나기의 여름을 지나 찬서리 내릴 때쯤 파삭해진 줄기 사이로 문득 누런 덩이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쓸모없는 밭 둔덕이나 구석진 땅에서 저 혼자 부지런히 덩굴손을 내밀며 온 사방을 무성한 잎들로 뒤덮고 줄기차게 꽃을 피워내더니, 마침내 세파에 시달리면서도 숫저움을 잃지 않은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다.

추운 날이면 가끔씩 호박범벅을 끓여보고 싶다. 팥과 강낭콩을 듬뿍 넣어 거무튀튀하지만 깊은 맛이 나는 경상도식 범벅으로. 오래 전, 모두가 힘겹던 시절엔 밀가루를 넣어 풀떼기죽 같던 호박범벅도 꿀맛 같았었다. 겨우내 대청마루를 지키고 있던 늙은 호박으로 범벅 끓이는 날은 작은 잔치라도 하는 듯했다. 뜨거운 범벅에 혀를 데어가며 올챙이배가 되도록 먹던 그 맛의 추억! 찹쌀가루 푼 범벅을 처음 맛보던 날 "와아, 이런 맛도 있나!" 환성을 질렀던 기억도 새삼스럽다.

편하다는 이유로 가끔 호박범벅을 사먹는다. 하지만 달착지근할 뿐 예전의 그 맛이 아니다. 어머니의 투박한 손의 기억도, 범벅솥 옆에서 종알대던 동생의 모습도, 고향의 내음도 거기엔 없으므로. 아직도 어머니가 끓인 호박범벅을 먹을 수 있다면 참 행복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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