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한 에이즈 환자의 '커밍아웃'

"제가 죄인입니까?"

"꼭 본명을 밝혀주세요. 저는 몸이 아픈 사람이지 죄 지은 사람이 아닙니다."

지난 27일 지역 에이즈(AIDS) 환자 지원을 위해 문을 연 대구·경북 '레드리본(Red Ribbon) 정보센터' 사무실에서 만난 HIV(에이즈 바이러스) 감염자인 박광서(34)씨. 그는 인터뷰에서 본명을 고집했다. 방금 전 센터 개소식에서 잔뜩 긴장된 표정으로 축사를 하던 때와는 달리 차분한 목소리. 동네 슈퍼에서 한두 번은 마주쳤을 법한, 평범한 모습으로 자신의 슬픈 사연을 풀어놓았다.

박씨의 그런 얼굴 뒤에는 '어떻게 살았는지 기억조차 하기 싫은' 10여 년의 세월이 있었다. 그는 1994년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했다가 보건소로부터 AIDS 양성판정을 받았다. 통보 받았을 때는 오히려 담담했다. 그러나 6개월 만에 퇴원한 뒤 돌아갈 가정도, 직장도 없었을 때 자신의 인생이 전과는 크게 달라졌음에 절망했다.

밤마다 구석진 방에서 술에 취해 울었다. 노래방, 주유소, 편의점 종업원부터 공사판 일용직 잡부까지 먹고 살기 위해 해보지 않은 일이 없었다. 그런데도 밥보다는 라면을 먹는 날이 많았다. 너무 배가 고파 친구 지갑에서 6만 원을 훔쳤다가 16개월 옥살이를 했다. 교도소 내에 '에이즈 환자'라는 소문이 퍼지자 그에게 침을 뱉는 재소자도 있었다.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나를 통해 감염인들의 처절한 현실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박씨가 한 TV 프로그램에서 자신의 감염사실을 공개한 것은 1998년 초가을. 몇 개월째 노숙자로 떠돌던 때였다. 그는 실명과 얼굴을 그대로 내보내는 조건으로 방송을 결심했다.

속이 후련한 것도 잠시. '커밍아웃' 후의 삶은 오히려 더 힘겨웠다. 식당에서는 그가 먹은 밥그릇을 검은 봉지에 싸 버렸다. 병원에서도 식기를 주황색 감염성 폐기물 봉투에 넣어 내놓아야 했다. 에이즈 치료에 효능이 있는 '물'을 만든다는 한 일본 업체에 속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일본으로 건너갔지만 3개월 동안 '마루타' 취급만 당했다.

박씨 인생에 희미한 햇살이 비친 것은 그 즈음이었다. 국내 한 에이즈예방기관을 통해 남아프리카 공화국, 스페인 등을 방문할 기회가 주어졌다. 당당하게 감염사실을 밝히고 일반인과 살아가는 그곳 감염인들의 모습은 충격이었다.

그는 1999년 9월 HIV감염인 및 에이즈 환자를 위한 온라인 모임인 '러브포원'(www.love4one.com)을 창립, 두 번째로 세상 밖으로 뛰쳐나왔다. 일년 전엔 혼자였지만 이번에는 같은 고통을 겪는 이들과 손을 맞잡았다. 이곳에는 감염인 300여 명 등 750여 명의 회원들이 에이즈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없애기 위해 정기모임을 가지며 활동하고 있다. 24시간 상담전화(0505-343-7869)도 운영하고 있다.

박씨는 이미 면역체계 이상증상이 나타난 에이즈 환자들과 달리 가끔 병원에 들를 뿐 특별한 치료를 받고 있지 않다고 했다. 그가 고치고 싶은 것은 자신의 아픈 몸과 세상의 편견이다.

"에이즈에 대한 오해는 무지에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에이즈와 감염인을 멀리하고 퇴치할 것이 아니라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정하고 함께 살아가는 사회 풍토가 가장 효과적인 치료법입니다."

박씨는 그렇게 햇빛 속으로 걸어나왔다. 국내에선 현재 공식적으로 3천200여 명의 에이즈 감염인들이 고통받고 있고, 혼자서 고통을 떠안고 있는 비공식 감염인까지 포함하면 8천여 명을 헤아린다.

최병고기자 cbg@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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