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과 돈은 비슷한 속성이 있다. 가질수록 욕심은 끝이 없다. 남용도 문제지만 쓰지 않으면 혼란과 아우성을 불러 온다. 돈이나 권력 모두 적정한 사용이 중요하다. 그래서 가질 자격이 있느냐를 따지게 된다. 둘 다 지나치게 많이 쓰거나 아예 쓰지 않으면 물줄기의 흐름을 막고 얼어붙게 한다.
국가가 스스로 불법을 자행한 안기부 불법 도청 사건의 핵심도 권력의 탐욕성 때문이다. 권력의 유한성을 망각한 채 더 많은 권력을 얻고 쓰기 위해 도둑 귀동냥질을 하게 했다. 신한국 창조를 내세우며 과거 정부와의 차별성을 주장하던 김영삼 정부 시절이 이번 도청 사건의 무대였다는 사실은 또 다른 권력의 속성을 일깨워 준다. 나만 깨끗하고 나만 옳다는 오만이다. 도청 사건에서, 깨끗한 나만이 사회의 부도덕을 없앨 수 있다는 독선과 편견이 엿보인다면 지나친 억측일까.
오만과 독선은 과거와의 결별로 이어진다. 이전의 성과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속성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권이 바뀔 때면 언제나 개혁의 구호가 등장한다. 잘못된 과거를 반성하고 새롭게 나가자는 정신이야 당연히 필요하다. 그러나 개혁의 구호 뒤에는 과거에 대한 흠집내기가 웅크리고 있다.
역사는 억지로 가꾸고 고칠 대상이 아닌데도 '역사 바로 세우기'라는 이상한 구호까지 나왔다. 오만과 독선이 과거를 무조건 부정하게 한다. 살아 있는 권력이야 과거로부터의 자유가 편리할 터다. 그러나 과거를 순응하며 살아 온 선량한 다수의 국민은 과거의 부정에 혼란스러워한다. 법을 지킨 일이 오히려 잘못 살아온 일이 된다면 누가 법을 지키고 따르려고 할까.
불법 도청 테이프의 공개가 대세로 가는 모습에서도 권력의 나쁜 속성이 엿보인다. 정부와 국회는 물론 제각각 권력을 지닌 모든 집단이 나서서 도청의 위법성을 없애고 도둑질로 얻은 장물을 나눠 갖자고 한다. 그러나 법은 편의에따라 이리저리 바꿔야 할 대상이 아니다. 원칙을 무시한 채 이리저리 법을 바꾸는 일이 또 다른 위법과 무질서를 낳는다는 사실을 애써 모른체한다. 흥분한 국민을 달래고 설득하며 질서를 찾아야 할 이들이 나라를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가고 있다.
권력의 변화에 따라 불법이 정당성을 찾는 일이 반복되면 사회는 기강을 잃고 만다. '때려잡자 김일성, 쳐부수자 공산당'의 구호를 외치며 반공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살아 온 국민은 '미군의 참전으로 우리 국민의 피해가 컸다'는 희한한 논리가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는 오늘에 혼란스러워한다. 어느 것이 옳은지를 놓고 죄 없는 국민을 서로 싸우게 한다.
권력은 쓰지 않으면 남용만큼 위험하다. 제 6공화국 이래 우리 대통령들은 직'간접적으로 야당과 반대 세력 때문에 국정 운영에 차질을 빚는다는 말을 곧잘 해왔다. 외환 위기도 야당의 발목 잡기에서 비롯됐으며, 나라 개혁도 발목 잡기로 미뤄지고 있다고 호소한다. 국정의 무한 책임을 지는 대통령의 자리에서 자주 할 말이 아니다. 발목이 잡혀 우왕좌왕하라고 대통령으로 뽑은 것이 아니라 나라 살림을 잘 살아 달라고 선택한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최근 연정을 제안한 배경에는 지역 구도 타파가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지역 구도는 영호남 사람들이 만들고 지키는 것이 아니다. 지역 구도를 깰 수 있는 기회를 권력이 망치고 놓쳤다. 영남 지역에서 상대적인 지지도가 낮았던 김대중'노무현 두 대통령의 초반 시절 대구'경북에서도 이들에 대한 지지는 거의 절대적이었다. 잘해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그래서 반대하고 지역 구도가 깨지지 않는 것이다.
박정희'전두환 두 전 대통령으로 이어진 산업화의 역사를 부정해 온 이후 정부가 국민의 살림살이를 살찌우지 못했다면 이는 정치 구호의 허구성을 실감나게 한다. 권력은 쓰지 않는 게 능사가 아니며, 언제까지나 민주화가 절대의 가치도 아니다. 달콤한 속성의 늪에서 권력은 하루빨리 나와야 한다. 그래야 국민이 편해진다.
서영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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