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자궁 선망과 여성의 침묵

불빛 속에서 두 팔을 하늘로 뻗친 채 춤추는 한 전라의 임산부가 있다. 황홀경에 빠진 그녀는, 어둔 문간에서 그녀를 응시하고 있는 남편의 존재를 묵살한다. 화형을 당한 듯한 두려움과 심한 눈의 통증으로 떨던 그는, 살해 충동에 이를 만큼 오만에 찬 그녀를 질시한다. D H 로렌스의 장편 '무지개'의 한 장면이다. 그는 작금의 자궁 선망을 예견한 걸까?

남근 숭배와 음경 선망이 사회적 지배 코드였던 시대엔 여성의 몸은 결여와 수치의 대명사였다. 또 여성의 몸이 감당해왔던 역할은 그들을 가정에 함몰시키는, 자아발전의 걸림돌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현대 페미니즘이 성차를 인정하고 여성의 몸을 긍정적으로 보게 되면서, 여성의 몸의 변화는 고통을 수반하지만, 남성과는 달리 유기체로서의 자신의 몸을 가장 직접적으로 느끼고 '즐길 수도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인식도 확산되었다.

황우석 교수는 줄기세포를 돼지의 자궁에 이식했다고 한다. 배아세포를 만들려면 여성의 자궁에서 난자를 채취해야 하고, 체외수정을 한 수정란도 아기가 되려면 여성의 자궁에 착상되어야 한다니, 첨단생명공학시대에도 자궁은 복제할 수 없는 모양이다. 이 복제 불가능의 자궁과 이를 소유한 여성은 생명공학시장(?)에서 선망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선망의 대상은 무력하면 착취당하기 쉽다. 여성의 몸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남성욕망 충족을 위한 착취 대상이 된 사례와 그 증거는 많다. 불임 여·남성들에겐 빛이 될 최근의 '난자 밀매'자나 '대리모' 역시 정신적·육체적으로 엄청난 고통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밝은 미래를 위한 자발적 난자 기증자나, 자궁 대여자가 있다면 왜 침묵하는가? 침묵은 어둠처럼 온갖 착취 벌레의 온상이 되기 쉽다.

생명 잉태란 인간의 기본욕망을 위해 첨단과학의 혜택을 누릴 자유는 있을 것이다. 불치·난치병 환자들의 치유 욕망 또한 예외가 아닐 것이다. 생명공학이란 것도 이런 타자들의 간절한 소망의 결과물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 한가운데 여성의 몸이 있으니 그 방향키는 여성의 손에 쥐어져야 한다. 이미 공적담론으로 확대된 만큼 여성들의 목소리가 그 담론을 주도해야 할 것이다.

정화식(대구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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