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상 밖' 사람들-칠곡군 지천면 기슭 '점마' 마을

칠곡군 지천면 심천(深川)리. '계곡이 깊다'는 이름부터 심상치않다. 대구에 인접해있지만 지금까지도 개발과는 동떨어진 채 옛 모습 그대로다.

심천마을의 가장 끝자락은 '점마'마을. 유학산 자락 건령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이 산골마을을 찾아가기란 쉽지않았다. 수소문 끝에 이 곳 출신 이상기(44·칠곡군청 근무) 씨가 길잡이로 따라 나섰다.

개울을 따라 10분쯤 올라가는 길은 말끔하게 포장돼 있다. 하지만 이씨에 따르면 이같은 호사는 불과 수년밖에 되지않는다. "어린 시절에는 신동초등학교까지 1시간30분을 걸어서 다녔어요. 겨울철에는 깜깜한 새벽에 집을 나서야했지요."

마을로 가던 중 '터줏대감' 이추연(78) 할아버지를 만났다. 조상대대로 점마에서 살아와 별명도 '점마 할배'다. 이 할아버지는 지난 89년 점마마을을 떠나 아랫마을로 내려왔다. 함께 어울려 살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모두 떠난 뒤 혼자 버티다가 결국 마지막으로 합류했다는 것.

점마마을에는 쇠락의 흔적이 선연하다. 이 할아버지는 잡초더미 속에 허물어져 가는 옛집을 둘러보면서 "이 곳에서 평생을 살아오면서 6남매를 다 키웠는데..."라며 애잔한 정을 보인다.

피폐한 기운이 가득한 동네 한복판쯤 번듯한 집 한 채가 있다. 안으로 들어서니 겨우살이를 위해 장작을 패고 있던 주인 이용태(66)씨가 내다본다. 낯선 손님을 발견하곤 "이런 산골을 어떻게 찾아오셨는가?"하더니 함께 온 이 할아버지를 발견하고는 얼른 나와 인사를 한다. 부엌에 있던 안주인 이정란(62)씨도 "아이고, 어른이 어떻게 오셨습니까?"하고 반갑게 맞는다.

점마에는 이 할아버지가 아랫마을로 내려간 뒤 터줏대감 역할을 하고 있는 이씨 부부를 비롯해 모두 4가구가 산다. 이씨의 동생 이춘식(61)씨, 재실에 딸린 집에 사는 황도순(81) 할머니, 최근에 대구에서 이주해온 우모(여·50)씨 등 5명이 전부고 산자락 위에 있는 암자는 주민들과 별다른 왕래가 없다.

햇살이 따스하게 내려쬐는 마당 가운데 놓인 평상에서 이씨 부부는 이 곳 산골마을에 들어온 인생역정을 털어놨다. 이씨는 중풍을 앓는 노모, 양다리가 마비된 동생 춘식씨와 함께 마흔에 점마에 들어왔다. 당시엔 아무도 살지않는 텅빈 마을이었고 수년 동안은 겨우 목숨만 연명했다고 했다.

부인 이씨가 아들이 군대에 간 후 92년 말 점마로 들어오면서 형편이 조금 나아졌다. 누에도 치고 가축도 기르고 농사도 짓기 시작하는 등 본격적인 살림살이가 시작된 것.

빈궁한 삶을 극복한 고생담이 끝없이 이어지던 중 부인 이씨가 대화에 끼여들자 이씨는 "어허, 이 사람이 그런 이야기는 왜 해?. 가서 밥이나 차려"라며 핀잔을 준다. 서로 티격태격 하는 재미로 살아가는 듯 하다. 그래도 세상 일을 잊고 산 덕분인지 50대처럼 보이는 이들 부부는 "그래도 요즘이 제일 행복하다"며 웃어보였다.

이런저런 인생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점심준비가 다됐다. 모처럼 손님이 왔다며 장작불에 구워 내놓은 고등어와 싱싱한 미나리, 배추, 상추는 절로 입맛을 다시게 했다.

" 내가 직접 만든 청국장이야. 우리는 조미료라고는 아예 몰라. 이게 웰빙이지 뭐가 웰빙이야?" 많이 먹으라며 밥 한주걱씩을 더 권하는 안주인의 표정엔 인정이 철철 넘친다.

이씨 부부는 1천여평의 산비탈에서 또다른 '식구'들과 살아간다. 사슴, 염소, 토종닭. 기러기들이다. 부인 이씨가 밥통을 들고 꽹과리처럼 두들겨 산속에 흩어져 있는 염소들을 불러 모은다. "애들아 밥 먹어라!"고 소리치자 멀리서도 목소리를 알아듣고 줄지어 몰려온다.

한켠에 마련한 물웅덩이엔 기러기들이 모여 놀고 있다. 3주전에 깨어난 새끼들이 어미를 졸졸 따라다닌다. 주인 이씨가 가까이 가도 놀라지 않는다.

"기러기들은 가끔씩 집을 떠나 자연으로 날아갔다가는 금방 또 날아와. 가끔 포수들이 사냥개를 몰고 오면 화들짝 놀라서 동네 아래 저수지에 갔다가도 저녁때쯤이면 돌아오지."

허름한 천막집에 사는 이씨의 동생, 춘식(61)씨를 찾았다. 평소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탓인지 이씨는 속옷바람으로 손님을 맞았다.

춘식씨는 요즘 칠곡의 유명인사로 떠올랐다. 초등학교 2학년 중퇴 학력에 온몸이 성치못한 장애자이지만 3년 동안 갖은 고생 끝에 손수 자동차를 만들어 타고 다녀 TV에 소개된 것.

하지만 형님 부부는 스티로폼으로 만든 가설 움막집에 사는 동생이 너무 딱하기만 하다. "만약 볼이라도 나면 혼자서 움직이지도 못해 꼼짝없이 화를 당할 것"이라며 "군청에서 지금 이규모만큼의 블록집이라도 짓게 허락해주면 좋겠다"고 했다.

광주 이씨 재실에 딸린 집에 살고있는 황(81) 할머니가 보따리를 챙겨들고 집을 나선다. 눈이 안좋아 안약도 사고 친척 결혼식에도 참석하는 등 오랜만에 겸사겸사 대구에 가는 길이다.

황 할머니는 대구에서 살다가 정부의 영세민 이주정책에 밀려 20여년전 이 곳에 들어왔다. 귀가 어두워져 큰소리로 이야기해야 알아 듣지만 목소리와 기억력은 젊은이를 무색케 할정도로 또렷하다.

혼자 있을 때는 심심해서 곧잘 노래를 부른다는 황 할머니는 노래 한 번 들려달라고 부탁하자 금방 한 곡조를 뽑는다. "인생에 목숨은 초로와 같고...이몸이 죽어서 나라가 선다면 ...아∼돌같이 죽겠노라." 할머니의 청아한 목소리가 산골짝으로 퍼져나간다.

할머니는 세상밖으로 나갈 때면 신도에 살고 있는 현우환(68) 할아버지가 트럭을 몰고 와 태워준다. 황 할머니는 자신의 손발역할을 해주는 현 할아버지를 "정말 고마운 양반"이라고 소개한 뒤 이씨에게 집 좀 잘 봐달라며 몇번이나 당부한 후 길을 떠났다.

이들의 삶의 터전인 점마도 곧 개발이 시작된다. 마을 입구에서 동명으로 통하는 군도개설공사가 추진중이다. 하지만 이 곳사람들은 개발이 반갑잖다.

"이 곳이 세상사람들에게 알려지면 우리네 삶의 방식이 깨어질지도 모르는 일이지. 하지만 기자 양반은 이제 길을 익혀뒀으니 꼭 다시 한번 놀러와." 이씨 부부의 마음의 평화가 오래오래 이어져야 할텐데....

칠곡·이홍섭기자 hslee@msnet.co.kr

사진 : (위)점마 마을전경. (아래)기러기 새끼들을 돌보고 있는 이정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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