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서가에서-전집시대

요즘은 많이 퇴락했지만 70년대는 전집물의 황금기였다고 생각합니다. 고등학교 시절 저도 그 전집물 때문에 사고를 친 적이 있습니다. 등·하굣길에 교문 앞에 펼쳐 놓은 문학전집을 호시탐탐 노리다가 마침내 학교에 낼 공납금으로 12권짜리 신구문화사 판 한국문학전집을 왕창 구입했던 겁니다.

부모님으로부터 작살이 난 건 불문가지지요. 그러나 보잘것없는 책꽂이에 의젓하게 꽂혀 있던 그 책들은 재산목록 1호였습니다. 지금은 거듭된 이사 끝에 그 재산목록 1호도 세파를 견뎌내지 못하고 중간중간 몇 권이 빠진 채 늙은 몸을 책장에 뉘이고 있습니다.

어렵던 그 시절, 서점에서 단행본을 살 여유조차 없던 이들에게는 장기월부로 문학전집, 위인전, 사상전집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은 큰 매력이었습니다. 그 전집물이라는 것이 지독하게 편향된 기획물이며 결코 싸지 않은 대가를 치른 것이라는 걸 깨달은 건 한참 후였지만, 그래도 그조차 없었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한때 모 유명 외국 백과사전 전질을 응접실 서가에 비치하는 것이 부의 상징처럼 여겨지던 때가 있었지요. 그와 함께 가급적이면 금박으로 장식한 두꺼운 양장본, 그것도 무슨 '서양사상 대계' 같은 이름을 지닌 책들은 졸부들의 대표적 전시용이었지요. 지금도 그런 경향이 아주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전집물이 점차 쇠퇴해진 데는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장식용으로서의 수명이 다했다는 점과 경량화에 탐닉하는 추세의 변화가 한몫했으리라 여겨집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장편대작 전집을 한 권씩 야금야금 읽어 마침내 전체를 독파해내는 희열도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그런 대작을 기획하고 그것을 수용했던, 읽을 것이 궁하던 시대는 이제 저문 날의 풍경 같은 것일까요.

박상훈(소설가·맑은책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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