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디지털 치매] 어! 이게 무슨 글자지?…'악필시대'

디지털 시대가 '악필 전성시대'를 낳고 있다. 글씨 쓰는 일은 세대와 지역을 가리지 않고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활동이었다. 하지만 디지털 기기 사용으로 글씨 쓰는 일이 아예 낯설게 느껴질 정도이다. 밤잠을 설치며 편지지를 찢고 찢어 쓰던 연애편지는 이젠 '그 때 그 시절'이 돼 버렸다. 이메일은 편지 쓰기의 수고로움을 덜고, 클릭 한 번으로 번거로움을 없애준다. 학교 과제물, 업무 보고서 등도 종이에 눌러 쓴 글이 아니라 프린터로 찍어낸 글이다.

지난 달 김모(33'회사원'대구시 달서구 신당동)씨는 애인에게 생일선물과 함께 줄 축하카드를 쓰느라 진땀을 뺐다. 백화점 문구매장에서 선물을 산 뒤 그곳에서 생일을 축하는 간단한 글을 적는데 글씨가 엉망인데다 줄까지 맞지 않아서 카드를 두 장이나 버렸다. 그는 "중'고교 시절만 해도 글씨를 잘 쓴 편이었는데, 이렇게 까지 글씨 쓰는 것이 어려울 줄 몰랐다"며 "컴퓨터로 글을 써서 카드에 붙이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부끄러워했다.

이모(42'회사원)씨는 얼마 전 친구의 늦둥이 돌잔치에 갔다가 재미난 광경을 봤다. 아이의 돌상 앞에는 실, 지폐 등과 함께 있어야 할 연필 대신 컴퓨터 마우스가 떡 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 그는 처음엔 황당했지만 아이가 살면서 연필보단 마우스를 만지작거릴 일이 더 많을 것이란 생각을 하니 고개가 끄덕여지더라고 했다.

최모(23'대구시 수성구 범어동)씨는 글씨가 초등학생 수준보다 못하다. 며칠이 지나면 자신이 쓴 글도 무슨 뜻인지 몰라 마치 암호를 풀 듯이 유추해야 할 정도라는 것. 그래서 최씨는 지난 9월부터 학원에서 글씨 쓰는 법을 배우고 있다.

대학생 이모(21'대구시 북구 칠성동)씨는 시험 때마다 글씨 때문에 불안하다. 시험 답안을 작성할 때는 시간에 쫓기고 긴장한 탓에 글씨가 괴발개발이다. 이씨는 "학교는 물론 입사 전형에서도 서술문제가 많이 나온다는데 걱정"이라고 했다.

악필교정 학원에는 이처럼 악필로 고민하는 학생, 주부, 직장인들이 많다. 자기 소개서나 이력서 등을 대필해달라고 찾아오는 사람도 있으며, 입시철에는 논술시험 준비를 위해 글씨를 배우는 수험생들로 북적인다고 한다.

일곡종합학원(대구시 중구 동일동) 조장희 원장은 "예전엔 악필이 드물었지만 디지털 시대가 되면서 젊은 세대의 경우 대부분 글을 잘 못쓴다"며 "악필을 교정하기 위해 학원에 오는 수강생이 100여 명에 이른다"고 전했다.

◇ "글씨를 자주 쓰지 않으면 악필 가능성 높아"

"눈이 나쁘다고 비정상이 아닌 것처럼 디지털 치매도 질병인 것처럼 심각하게 여길 필요는 없습니다."

박용진 진스마음클리닉 원장은 "인체의 모든 구조물은 사용을 하지 않으면 그 기능이 퇴화한다"며 "디지털 치매는 디지털 기기에 의존하는 바람에 뇌 기능, 특히 단기 기억을 담당하는 해마(뇌 중앙부 위치)의 기능이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고 설명했다. 즉, 디지털치매는 용불용설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것.

그는 "디지털 치매는 아직까지 의학적으로 질병으로 규정하지 않고 있다"며 "의학적으로 규명된 것은 아니지만 기기 의존도가 아주 높다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나이가 들면서 치매가 올 확률이 높아질 수는 있을 것"이라고 했다.

기억력이 떨어지면 뇌 기능 전체와 학습능력에 장애가 될 수 있을 것이란 걱정이 든다. 하지만 그는 "물론 기억력이 떨어질 수는 있다"며 "대신 인간은 창의력이나 논리적 사고 능력을 키우는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있기 때문에 디지털 치매는 학습능력에 큰 장애가 되지 않을 것이다"고 말했다.

컴퓨터로 글을 쓰는 것이 육필 보다 훨씬 쉽다고 하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 이에 대해 박 원장은 "습관과 환경의 변화 때문일 것"이라며 "다만 자판을 두드리는 것보다 글씨를 쓰는 작업이 더욱 정교하기 때문에 뇌 기능상의 미세한 차이는 있을 수 있겠다"고 풀이했다.

그는 "글씨를 쓰거나 자판을 두드리는 손가락 운동을 관장하는 뇌 영역은 같지만 반복학습과 숙련도에 따라 근육이 달리 발달하기 때문에 글씨를 자주 쓰지 않으면 악필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12월 8일자 라이프매일 www.lifemaeil.com)

김교영기자 kimky@msnet.co.kr 사진 박순국편집위원 toky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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