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풍-카드로 만든 집

어딜 가나 온통 '황우석 줄기세포' 얘기로 시끌시끌하다. 한 달여 동안의 무차별 학습(?) 덕에 모두들 거진 줄기세포에 관한 한 전문가급 견해를 쏟아낼 정도다. 흥청대던 세밑의 송년 모임도, 크리스마스 분위기도 예년 같지 않게 가라앉았다. 모두가 '새앙쥐 풀방구리 드나들 듯' 신문과 TV, 컴퓨터를 오가며 사태 추이에만 관심을 쏟고 있다.

만약 누군가 하늘에서 요즘 우리 사회를 내려다본다면 희한한 광경일 것 같다. 온라인에서는 네티즌들이 엎치락뒤치락 입씨름을 벌이고, 오프라인에선 한두 사람만 모여도 갑론을박이다. 난마처럼 뒤얽힌 사태에 너도나도 탐정이 된 양 저마다 추리력을 짜내는 모습이다. 난치병 극복의 꿈에 부풀었던 환우들과 그 가족들은 넋이 빠질 만큼 시름에 잠겨 있다. 한 달여 동안 온 국민의 눈과 귀를 꽁꽁 묶어 두고 수시로 심장을 철렁거리게 만드니 가히 메가톤급 핫 이슈다.

내일을 알 수 없는 사람들에게 살아갈 희망을 갖게 해 주었던 사람, 한국의 장밋빛 미래를 보여주고, 뿌듯한 자긍심을 갖게 해 주었던 그 사람이 어쩌면 희대의 과학 스캔들 주인공이 될지도 모를 판이다. "과학엔 국경이 없어도 과학자에겐 조국이 있다"던 그 말이 아직도 진한 여운으로 남아 있는데'''.

느닷없는 충격과 허탈감에 모두들 우왕좌왕하는 모습이다. 언제는 PD수첩팀을 공공의 적으로 몰아세우더니 이젠 황 교수 쪽을 손가락질하기에 바쁘다. 조그마한 자극에도 홱 급격하게 방향을 꺾는 송사리떼처럼 여론에 따라 갈팡질팡한다. 이토록 온 국민이 한꺼번에 우울함과 패배감, 수치심 등으로 휘말린 적이 있었던가.

아직 조사 중이지만 어쨌든 분명한 한 가지는 그토록 자랑스럽던 황 교수의 사이언스 논문이 조작됐다는 사실이다. 이젠 앞서의 연구 성과까지 모조리 의혹의 도마 위에 올려져 있다. 지난날 황 교수의 말은 '참' 그 자체로 여겨졌지만 지금은 의심부터 하는 분위기다. "곰팡이? 정전? 아니,어떻게 이토록 공교로울 수가? 머피의 법칙이 따로 없군" 하며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커졌다.

'황우석 파문'은 우리를 한없이 낙담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한가지 중요한 것을 깨닫게도 한다. 거짓은 결국 드러난다는 것, 좀 에두르는 한이 있어도 정직해야만 한다는 것. 사실 그동안 우리는 고속 성장 논리에만 매몰되어 과정의 미덕을 간과해 왔다. "모로 가도 서울에만 가면 된다"는 식의 결과주의가 우리의 의식을 지배해 버렸다. 국민을 상대로 천연덕스럽게 거짓말 하고도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정치인들, 닭 잡아 먹고도 무조건 오리발부터 내밀고 보는 소위 사회 리더들, 사기 천국이라 할 만큼 급증하는 사기 사건, 대입 휴대전화 부정 사건에 이어 이젠 초등학생들조차 이를 모방하는 판이니 더 무얼 말하랴. 당장 이번 '황우석 파문'에서도 관련자들마다 오락가락 말을 뒤집어 사건을 한층 꼬이게 만들지 않았는가.

우리 사회가 총체적인 '정직 결핍증'에 걸려 있다. 최근 투명사회협의회 조사 결과도 우리의 고질적 문제점을 드러내 준다. 우리 국민 5명 중 1명 정도만이 정직하고 청렴한 사람이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영국의 극작가 존 릴리의 말이 뼈아프게 와 닿는다. "정직을 잃은 자는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 소금이 짠맛을 잃을 때 더 이상 소금이 아니듯 사람이 '정직'을 잃으면 더 이상 인간으로서의 고귀함을 지닐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닐까.

그러기에 안타깝기 짝이 없다. 1년 전 연구원의 난자 사용에 대한 의문이 처음 제기됐을 때 황 교수가 솔직하게 털어놓았더라면 국내외적으로 따가운 비판은 받았겠지만 이토록 엄청난 사태로까지 비화되지는 않았을지 모른다. 국제 사회에서 거짓은 절대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사진 조작 등의 유혹도 물리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랬더라면 카드로 만든 집이 무너지듯 그 원대한 계획이 이렇게 허망하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터인데….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황우석 교수에 대한 애증이 교차되는 가운데서도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노래 가사처럼 이번 사태를 통해 우리 모두가 정직의 미덕을 뼈에 새겼으면 싶다. "죽더라도 거짓이 없어야 한다", "농담으로라도 거짓말하지 말아야 한다"던 안창호 선생의 말을 새겨봐야 할 때다. 그래서 이 사회가 보다 염결(廉潔)한 모습으로 거듭났으면 싶다.

全敬玉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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