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다. 봄이지만 이 나무는 이제 싹 틔우지 못한다. 우리 집 앞에 은행나무 가로수 한 그루가 죽어있다. 대문만 열면 소방도로 정면 건너편에 이 나무의 형해가 시꺼멓게 서 있다. 죽은 채 언제까지 서 있을 수 있나. 마른 가지로나마 시퍼렇게 살아있던 날의 수형을 그대로 펼쳐 보이고 있다. 그 봄에 대한 생생하고도 지독한 기억인 것 같다.
이 은행나무 가로수가 이렇게 죽기까지 만2년, 햇수로는 꼬박 3년이 걸렸다. 나는 그 전 과정을 싫든 좋든 지켜본 셈이다. 그해 2월 말쯤이었을 것이다. 집 인근 아파트 재개발공사와 관련, 동네 골목길이 8m에서 10m로 확장되고 있었다.
소형 포클레인이 직경 한 뼘가량의 은행나무 가로수들을 마구 찍어 옮겨 심고 있었다. 나무들마다 그 밑둥치 껍질이 '뼈'가 드러나도록 벗겨져 성한 것이 없었다. 그 중에서도 올해 싹을 틔우지 못하는 이 나무의 손상이 가장 심했다.
밑둥치 두 뼘 정도가 테를 두른 것처럼 한 바퀴 완전히 박피가 돼 버린 것. 수분 올라갈 길이 원천봉쇄된 것이다. 나는 이 나무가 당연히 당년에 죽을 줄 알았다. 그러나 이 나무는 세 번의 봄을 더 살았다. 느닷없이 닥친 죽음 앞에 그저 제 할일 다하고 있었다.
이 나무가 치명상을 입은 첫해엔 별다른 변화없이 거의 그대로 멀쩡하게 살아있었다. 불가항력, 그래서일까. 나무는 아예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하긴 그 어떤 비명이나 저항도 이 나무의 운명을 되돌려 놓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각인처럼 족쇄처럼 죽음을 밑둥치에 확실히 둘러놓고 나무는 저의 남은 생을 한 뼘, 두 뼘, 세 뼘… 가늠해 보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음 해 봄엔 이 나무의 기세가 완연히 무너져 있었다. 이웃한 다른 나무들에 비해 새싹의 크기나 움트는 속도가 눈에 띄게 떨어져 있었다.
연록, 신록, 녹음기를 거치는 동안 그 활착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다. 아래위로 목을 죄는 갈증, 그것은 지친 나무의 사막 같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이 나무는 그러나 열매 맺고, 잎 떨구고 하면서 또 한 해를 그렇게 살아냈다.
다시 또 그 다음 해, 나무가 다친 지 삼 년째 되던 작년 봄. 나는 오히려 생명력이란 것이 참 이렇듯 끔찍할 수도 있구나 싶었다. 이 나무의 뭇 가지에서 또 새싹이 튼 것이었다. 이런, 변이(變異)! 나는 대문을 열고 집을 나설 때마다 나무의 안간힘이 복통처럼 느껴졌다.
작년, 이 나무는 그렇게 몹시 바빴다. 싹 틔우자마자 서둘러 열매부터 맺고, 멀쩡한 이웃 나무들 보다 먼저 더 많이 맺고, 가지가 안 보일 만큼 바글바글 여물었다. 그러고 나서 이윽고 그 곤한, 작은 이파리들은 가지 속으로 파고들 듯 꼬물꼬물 다 말라붙어 버렸다. 탈진, 소진이었다.
이 나무가 완전히 숨을 거둔 것은 정확히 어느 시점이었을까. 단풍에, 낙엽 지던 지난해 11월까지 이 나무는 메마른 가지, 가지에다 분홍으로 익은 열매들을 터진 염주처럼 오종종 매달고 있었다.
나는 이 지경을 젊은 친구들한테 보여주면서 사진도 찍게 했다. 그러나 나는 이 열매들이 언제 다 떨어졌는지, 어디로 굴러갔는지 알지 못한다. 그 후 눈여겨보지 않은 탓이다. 그것이 가책이 된다.
그 열매들, 한두 줌이라도 수습해 어디 흙 좋은 곳에다 파종해 줬어야 했나 싶다. 도로 공사 때 "이 보시오, 이러면 이 나무들 모조리 버리는 것 아니오"라고 작업 인부한테, 현장 감독한테 항의 하거나 관할 관청 해당 부서에 전화 고발이라도 했어야 하지 않았나 싶다.
내게, 우리에게 남은 봄은 도대체 몇몇 번인가. 수령 천 년을 넘보던 이 은행나무는 이제 이 봄엔 고사목이다. 고사목이지만 아직도 그 정체는 여전히 은행나무다. 제 진정한 삶을 고스란히 제 몸에다 묻었기 때문일 것이다.
가묘 같은 것, 나무는 우선 제 몸이 무덤인 것 같다. 마지막 열매를 기어코 땅에 두고 간, 이 나무의 죽음에 대해 나는 지금 왠지 안도하고 있다. 나무여 너는, 생명의 책임과 도리를 다하였다.
문인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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