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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월드컵] ⑤94년 스웨덴 4강 이끈 거미손 라벨리

1994년 미국 월드컵은 나에게 있어 매우 특별한 대회였다. 이때 한달 가까이 우리 집에서 머문 사촌 형들이 겨우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나에게 월드컵에 관해서 많이 알려줘 그처럼 어린 나이에 드물게 월드컵 축구의 마력에 빠지게 되었다.

디펜딩 챔피언이던 독일과 볼리비아의 개막전에서 독일은 우승국의 권위를 풍기고 있었다. 독일 선수들은 매우 기초적인 인사이드 패스 하나를 할 때도 멋져 보였는데 그렇게 보인 것은 내가 정서적으로 독일 축구에 편향된 탓도 있었다. 후반전 약 15분쯤 지났을 무렵, 볼리비아의 문전 혼전중에 볼이 좌측으로 흐르자 이를 세계 최고의 골게터였던 위르겐 클린스만이 비호처럼 낚아채어 비어있는 상대 문전을 향해 침착하게 밀어넣었다. 어찌보면 상당히 평범한 골이다. 하지만 당시 나에게 전해진 감동은 그 어떤 멋진 골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클린스만의 득점에 매료된 나는 이후 독일 전차군단의 열렬한 팬이 되었다.

이 대회에서 이탈리아의 로베르토 바조나 브라질의 호마리우보다 나를 매료시킨 선수는 스웨덴의 케네트 안데르손이어었다. 큰 키를 활용한 제공권, 고감도의 슈팅 감각 등 페널티 구역안에서 아차 하는 순간, 가차없는 그의 한방이 통렬하게 골네트를 강타한다.

정확성이 뛰어난 그의 골 감각도 골 감각이었지만 독특한 골 세레머니도 인상적이었다. 어디론가로 달려간 후 인지와 중지를 모아 앞으로 내민 상태에서 가볍게 주먹을 쥐고, 뭔가를 찍은 듯이 양팔을 굽혔다가 펴는 세레머니로 자신이 넣은 5골에 대해 모두 이와 비슷한 자세를 취했다. 여기에 매료되어 경기내내 케네트 안데르손의 득점만을 기다렸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나는 그의 세레모니를 '집게 세리머니'라고 이름짓고 친구들과 축구 경기를 하며 직접 흉내내기도 했었다.

멋진 선방을 펼쳐보인 스웨덴의 골키퍼 토마스 라벨리도 아주 인상적이었다. 브라질을 응원하던 나는 호마리우, 베베투, 징요, 마징요, 둥가가 무수히 터뜨린 슛을 모조리 골라인 바깥으로 쳐낸 라벨리에게 눈길이 갔다. 마치 10명의 브라질 공격수와 스웨덴 골키퍼 1명이 싸우는 듯 했다. 라벨리는 호마리우의 슛이 골문을 비켜가자 골라인 부근에 설치된 카메라를 보고 익살스런 표정과 행동을 취했다. '그 정도의 슛으로 나를 뚫을 수 있겠느냐?'고 말하는 듯 했다. 브라질의 집요한 공격은 결국 호마리우의 헤딩골로 결실을 맺었지만 라벨리의 눈부신 선방은 그를 한때 나의 우상으로 삼게 만들었다. 그래서 난 당시 한동안 축구를 할 때 골키퍼를 자청하기도 했다.

이수열(대학생)

※ 대학생인 이수열씨는 마니아 수준을 넘어선 축구 지식을 바탕으로 고등학생 때 이미 축구 이론서를 세 권이나 내었고 지난해 '21세기를 이끌어갈 우수 인재상'인 대통령 메달을 수여했으며 최근에는 '한눈에 축구의 전략을 읽는다'는 축구 서적을 펴냈다. 군 입대를 앞두고 휴학중인 그는 자신의 방을 축구 서적과 자료, 비디오 등으로 가득 채우고 있는데 어릴때 본 1994년 미국 월드컵을 특별한 월드컵으로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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