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계산동에서] '라이방'의 추억

강렬한 햇볕이 내리쬐는 요즘, 거리엔 온통 선글라스 물결입니다. 얼굴을 절반 정도 가릴 만큼 커다랗고, 요란스런 장식이 달린 선글라스가 유행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선글라스는 눈을 보호한다는 원래의 기능에서 벗어나 패션 소품으로서 역할을 합니다. 아예 머리띠처럼 머리에 쓰기로 합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수십만 원짜리 명품 선글라스가 불티나게 팔린다고 합니다. 눈을 보호하는 기능(자외선 차단)보다는 선글라스에 찍힌 브랜드 로고와 멋진 디자인이 선택의 기준이 되고 있습니다.

선글라스를 '라이방'이라고 부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라이방이란 말은 선글라스의 원조 브랜드격인 '레이 밴'(Ray-Ban)을 우리 식으로 발음한데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베트남 전쟁 때 한국의 참전용사들이 그곳에서 찍어서 보내 온 사진들 속에 나온 '레이 밴'이란 상표를 보고 '라이방'이라고 부르게 됐다더군요.

선글라스를 '라이방'이라고 부르던 시절, 선글라스는 '힘'과 '위장'의 상징이었습니다. 선글라스가 눈을 보호한다는 제 본분을 잃기는 그때도 마찬가지였나 봅니다. 선글라스 하면 연상되는 사람은 단연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아니겠습니까. 별 두 개 달린 군복에 선글라스를 낀 모습은 그 시절을 보낸 분들에겐 아직도 잊히지 않는 장면일 겁니다. 선글라스 렌즈 색깔처럼 서슬이 퍼렇던 시절이었지요. 그는 집권 초기 미국을 방문할 때 자신의 표정을 숨기기 위해 선글라스를 썼다고 합니다. 박 전 대통령뿐만 아닙니다. '음지에서 일하던 분들'(공무원이지만 통상적으로 기관원이나 요원이라고 불렸음)도 선글라스 마니아였습니다. 그 시절을 배경으로 한 소설에는 그 분들을 '선글라스'라고 표현하기도 했죠. 아무튼 죄 없는 사람들조차도 '선글라스'를 보면 괜히 주눅이 들곤 했답니다.

선글라스의 부정적 이미지에 대한 역사는 선글라스의 기원과 함께합니다. 태생적 한계나 원죄라고나 할까요. 선글라스의 기원은 11세기 중국 송나라 시절, 연수정(煙水晶)을 이용한 색안경에서 비롯됩니다. 연수정을 이용한 안경은 처음엔 단순히 눈부심을 막기 위해 썼다고 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판관들이 죄인을 심문할 때 자신들의 표정을 숨기기 위해 사용했답니다. 선글라스가 제 본분을 잃고 존재하는 것은 1천 년 전에도 마찬가지였네요.

나이 지긋하신 분들은 실내에서 젊은이들이 선글라스를 쓰는 것을 예의에 어긋난 행동이라고 꾸지람하십니다. 몇몇 어른들께 여쭤도 그 이유를 정확히 말씀해 주시는 분들이 없더군요. 짧은 생각에 그냥 선글라스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 때문이 아닐까 하고 짐작할 뿐입니다. 아무튼 실내에선 선글라스를 벗는 게 좋겠습니다. 대화를 할 때 그 사람의 눈을 볼 수 없으니까요. 상대의 눈을 보지 못하면 마음을 읽을 수 없습니다.

기왕 선글라스 얘기를 꺼냈기에 말인데, 이왕이면 마음의 선글라스(색안경)도 벗어 버립시다. 색안경을 끼고 사람을 평가하거나 세상을 바라보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김교영 라이프 취재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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