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분권이 연구 차원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지방이 중심이 된 최초의 범시민운동, 지방 간에 연대하는 최초의 범국민운동이 되어야 합니다. 지방분권이 지역사회의 아젠다가 되면 철벽같은 중앙 정치권과 정부도 움직일 것입니다. 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 주요 후보의 공약으로 지방분권이 채택되면 절반이 성공할 것입니다. 지방이 살아야 나라가 삽니다."
6년여 전 2000년 가을 제법 쌀쌀한 기운이 감돌았던 어느날 저녁 대구사회연구소 운영회의에 참석한 한 인사가 그렇게 발언했다. 예닐곱 명의 참석자들은 누구 하나 더 이상 입을 떼지 못했다. 비장감마저 감돌았다. 너무나 아득했다. 대구가 중심이 된 지방분권운동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리고 3년이 지난 2003년 12월 29일 국회는 지역민들 사이에 '지방살리기 3대 특별법'으로 불린 지방분권특별법, 국가균형발전특별법, 신행정수도건설을 위한 특별조치법을 통과시켰다. 그날 지방분권국민운동 관계자들은 서울 광화문에 있는 한 카페에서 조촐한 자축연을 열었다. 환희의 밤이었다.
3년여 계속된 지방분권 운동의 길은 험난했다. 긴 호흡으로 이어지는 운동으로 지칠 때도 많았다. 세미나, 포럼, 심포지엄, 토론회, 기자회견, 전국지역지식인선언…. 각 지역의 주민과 언론들도 깊은 관심을 보이다가 역시 지쳐 관심의 끈을 늦추기도 했다.
하지만 지방분권국민운동의 바람대로 17대 대선에서 지방분권은 핫 이슈가 됐다. 민주당 노무현, 한나라당 이회창,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가 지방분권국민운동과 분권 협약식도 가졌다. 당선된 노무현 대통령은 결국 지방분권 3대특별법 제정에 착수, '광화문 자축연'이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신행정수도 건설이 구체화하자 수도권과 보수언론, 보수야당 등 반노무현 세력이 거세게 저항하고 나섰다. 헌법재판소는 서울이 수도라는 것은 '관습헌법'이라며 수도권의 손을 들어줬다. 이 와중에 신행정수도에 찬성하면 '친노(親盧)', 반대하면 '반노(反盧)'라는 해괴한 이분법이 생겨났다.
지방분권 3대 특별법은 12부 4처 2청이 이전하는 행정도시와 176개 공공기관을 지방으로 이전하는 정책을 낳았다. 그리고 우리에게 조금씩 잊혀져가고 있다. 교육자치제, 자치경찰제, 지방대학 육성, 지방금융기관 육성 등 숱한 과제가 남아 있으나 누구 하나 이를 거론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노무현 대통령이나 정부 여당은 이제 지방분권이란 말만 들어도 겁이 덜컥 날지 모른다. 인구의 절반인 수도권이 반대하는 마당에 지방이라도 전폭적 지지를 보내줘야 하는데 그게 그렇지 않았다. 행정도시와 공공기관 이전에 대해 각 지역은 갈가리 찢어져 이해득실을 계산하기에 바빴다. 학자, 언론인, 변호사 등 이른바 지식인들도 지방분권을 얘기하지 않는다. 당장 '친노'로 몰릴지도 모르는 노릇이기 때문일 게다.
이런 토양 속에 '서울이 강해져야 대한민국이 강해진다'는 얘기가 들리더니 급기야 '대수도론'까지 제기됐다.
이제 지방은 어떻게 할 것인가? 내년 대선에서는 2002년처럼 '지방분권'이 아니라 '대수도론'이 이슈가 될지도 모르는데 지방은 어떻게 해야 하나? 행정도시 건설과 공공기관 이전으로 지방은 만족하는가?
지역이 중심이 된 지역 간 연대운동인 지방분권운동이 예닐곱 명의 초발심(初發心)으로 비롯됐듯이 내년 대선과 다음 정권을 겨냥해 '제2의 지방분권운동'의 불을 지필 지사(志士)는 없는가? 수도권 일각에서 제기되는 '대수도론'은 가볍게 일축하고, 지방분권이 움직일 수 없는 시대적 명제가 되게 할 지혜와 열정을 가진 로칼리스트(지역주의자)는 없는가?
'어게인 2002'. 수도권에 비해 비수도권 주민의 삶의 질이 여전히 형편없기에 지방분권, 지역균형발전 정책은 다음 정권, 또 다음 정권에서도 계속돼야 할 정책이어야 하고, 그런 지방 중심의 철학을 가진 사람이 대통령이 돼야 하지 아니한가!
최재왕 서울정치팀장 jwcho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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