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재개발 전쟁'…주민갈등과 공급과잉 우려된다

지난 달 대구시 기본계획 고시 발표 이후 다시 불기 시작한 재개발 전쟁은 단순히 동네주민 갈등에 그치지 않는다.

이른바 '정비업체'들이 '전쟁'을 주도하면서 주민-정비업체-시공사로 이어지는 구조적 부패 연결고리를 형성할 우려가 크기 때문. 정비업체들 스스로도 외지업체들과 일부 토종 업체들이 주민들을 '유혹'해 "대구 재개발 시장을 흐려놓고 있다."고 걱정할 정도.

뒤늦게 정부 차원의 대책이 논의되고 있지만 대구시나 구청들은 정비업체 관리에 여전히 손을 놓고 있다. '내 업무가 아니라서', '아는 게 없어서', '주민 민원이 두려워서'라고 행정기관 공무원들은 털어놨다.

◆주민갈등과 공급과잉 우려

대구 동네마다 하루가 멀다하고 이뤄지는 재개발추진위원회 신청은 동네주민들 보다는 밖에서 들어온 정비업체들이 주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려를 낳고 있다. 주민들이 재개발 계획을 세워 정비업체를 먼저 찾기 보다는 재개발 기본계획 고시발표를 전후해 정비업체들이 스스로 다가오고 있다는 것.

"정비업체들이 몰려들면서 조용하던 동네가 쑥대밭이 됐어요. 추진위원회를 만든다고 준비위원회 사무실이 3개나 들어섰죠. 서로 다른 정비업체들을 지지하는 주민들이 온 동네를 휘젓고 다녔습니다. '돈'에 눈이 멀어 이웃간 정만 잃게 되는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중구, 남구 재개발 동네에서 만난 주민들은 하나같이 "동네사람들이 등을 돌리고 싸우고 있다."고 걱정이었다. 정비업체들은 일단 제사람 심기에 나서면 선물공세도 마다하지 않고 교묘하게 상대편 주민들을 헐뜯어 불화를 조성한다는 것.

대구 정비업체들은 "외지업체들 때문"이라며 화살을 돌렸다. 대구업체들이 수개월전부터 터를 닦아 놓은 곳에 느닷없이 치고 들어와 덤핑 공세를 펼친다는 것.

"주민들에게 받는 컨설팅 수수료가 따로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한국정비업체 협회에서 정한 '표준화 단가'라는 게 있습니다. 하지만 외지업체들은 상식 이하의 가격으로 주민들을 공략합니다."

A정비업체 관계자는 "덤핑공세로 재개발 추진위원회 신청 싸움에서 승리한 외지업체들이 2, 3곳 나타나기 시작했다."며 "도대체 어떻게 대처해야 할 지 모르겠다."고 한숨 지었다. B정비업체 관계자는 "외지 업체와의 싸움에서 어렵게 이긴다 하더라도 후유증이 만만 찮다."며 "반대 주민들을 설득해 재개발 동의를 받아내는 과정에서 개발 지연이 불가피하다."고 하소연했다.

공급과잉에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다. 대구를 비롯, 전국 정비업체 상당수는 이른바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가공회사(페이퍼 컴퍼니)'. 5억 원 이상 자본금 요건을 통과하기 위해 사채 등으로 자금을 끌어 정비등록을 끝마친 뒤 재개발 잇속만 챙기는 것.

대구에는 지난 2003년 9월이후 지금까지 모두 40개사가 정비업체로 등록했지만 1, 2년도 채 안돼 등록말소한 회사만 10개에 이른다. C정비업체 관계자는 "이런 정비 업체들은 사업성이 높은 재개발 동네를 찾아내기가 어렵고 시공사 선정에서도 주민 이익보다는 업체 이익만 챙기기 마련"이라며 "결국 아파트 공급 과잉만 부르고 정작 주민은 손해보는 사태가 잇따르지 않을까 걱정"이라고 말했다.

◆비리는 없나?

"어떤 정비업체는 주민 관광을 시켜줬고 다른 정비업체는 뷔페식당에 초대, 주민들을 대접했다고 합니다. 주민동의서를 받아오면 1장당 10만 원을 준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중구, 남구 일대 재개발 동네에서 심심찮게 들리는 소문들. 재개발 수주를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일부 정비업체들이 불·탈법을 일삼고 있다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같은 과열 경쟁이 구조적 재개발 비리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 실제 국가청렴위원회의 실태조사 결과, 대구보다 1년 먼저 고시를 낸 서울, 경기 일부 정비업체들은 시공사 및 철거, 새시업체 선정 등에 주도적으로 개입, 부패 연결고리 역할을 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정비업체들이 대형 건설업체와 연결돼 있고 동의서를 많이 받아오는 주민들이나 추진위원회 간부들에게'뇌물'을 줘왔다는 것.

대구 정비업체들은 "외지업체들과 일부 토종 업체들이 재개발 주민들에게 턱없이 낮은 수수료를 제시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며 "이런 업체들은 주민 동의서를 최대한 받아낸 뒤 다른 정비업체에 재개발 관련공사 수주 및 보상을 요구하기도 한다."고 귀뜀했다.

◆이렇게 바꾸자

지난 21일 재건축·재개발 제도개선 공개토론회를 연 국가청렴위는 정비업체들을 비롯한 재개발·재건축 비리를 원천차단하는 방법으로 정비업체나 시공사 대신 지자체가 해당 재개발 주민들의 초기 운용자금을 지원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추진위원회-정비업체-시공사로 이어지는 비리관행은 사업추진 자금이 부족한 주민들이 정비업체나 시공사 '돈줄'에 의지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라는 것. 앞으로는 해당 지자체가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기금을 집행하도록 의무화 해 음성적 뒷거래를 몰아내자는 것이다.

하지만 기금 마련까지 얼마나 시일이 걸릴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보다 현실적인 대안이 필요하다는 지적. 몇몇 대구 정비업체들은 "일부 업체관행을 전체 잘못으로 키우는 일은 옳지 않다."면서 "정부와 해당 지자체가 정비업체 자격강화 및 관리부터 서둘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도시환경 및 주거정비법 개정 이후 탄생한 정비업체들의 원래 설립 목적은 주민 컨설팅. 현재 한국정비업체협회에서는 컨설팅 능력을 잣대로 정비업체 등록요건을 강화해야 한다는 자체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지자체들이 정비업체 실태조사에 나서야 한다는 업계 의견도 커지고 있다. 국가청렴위가 뒤늦게 실태 파악에 뛰어들어 봤자 사후약방문에 불과하다는 것. 업계 한 관계자는 "정비업체 등록만 받는 대구시는 '실제 현장업무는 구청 소관'이라며 떠넘기고, 구청은 정비업체와 연결된 주민 민원을 우려해 불·탈법에 손을 놓는 한 구조적 재개발 비리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 말했다.

이상준기자 all4you@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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