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를 맞았던 1998년은 혹독했다. 100여개에 육박하는 금융기관이 퇴출하고, 중견 기업이 무수하게 쓰러진 대구·경북의 시련은 더 컷다. 퇴출한 대동은행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서울 이태원에서 베스트부동산컨설팅을 운영하는 김상홍(金相洪·48) 사장은 당시 대동은행 지점장이었다. 의성 출신으로 대구상고를 졸업한뒤 대구은행에 입행, 외환 전문요원으로 12년간 일하다 대동은행이 생기자 창립 멤버로 가담했다. 공보실장으로 행장의 지근거리에서 일하며 대동은행의 영화를 그렸다. "청천벽력이었습니다. 천직으로 삼은 은행원으로 정년퇴직까지 편안하게 살줄 알았거든요."
그는 대동은행 청산 작업에 참여하라는 제의를 받았다. 2-3년 일할 수 있었지만 싫었다. 대동은행을 누구보다 사랑했기에 청산 작업은 차마 지켜볼 수 없었다. 짐을 싸 서울로 향했다. 한번도 대구·경북을 떠나본적 없는 아내 김영수씨(45)와 어린 두 아들이 묵묵히 따라 나섰다. 산 입에 설마 거미줄이야 치랴. "가족이 저를 믿었던 것 같습니다. 정말 열심히 일하는 성실한 가장이었거든요."
집을 팔았다. 대구에 돌아갈 집이 있으면 나약해질까 겁이 났다. 외국인을 상대로 한 부동산컨설팅이 전망이 있을 듯했다. 여동생 사무실의 책상 하나를 빌려 쓰며 한달 동안 시장을 조사했다.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능력은 부족해도 열심히 일할 자신은 있었거든요."
당시 외국인을 상대로 한 부동산컨설팅업은 걸음마 단계 였다. 외국계 합작법인, 투자법인, 대사관 등지에서 일하러 한국에 오는 외국인들에게 집 임대를 알선해주고 한국을 떠날 때까지 관리해주는 신종 업종이었다. 너댓개 업체가 있었다.
한달만에 창업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따려고 학원에 다녔다. 1999년 4월 공인중개사 시험에 합격했다. 뛸 듯이 기뻣다. "창업은 했는데 공인중개사 자격증이 없으면 개점휴업 상태를 이어가야 했습니다. 물러설 곳이 없었지요. 머리는 별로 안좋아도 절박하게 공부하니까 합격했어요." 사람좋은 웃음을 지었다.
곧바로 영업이 시작됐다. 준비를 8개월여 간 계속한 덕분인지 영업이 순조로웠다. 아내가 때로는 사무실을 지키고, 때로는 운전기사 노릇까지 하는 등 1인3역을 했다. 프랑스에서 유학한 여동생의 도움으로 먼저 프랑스인을 고객으로 유치하려 노력했다. 은행 지점장 출신이란 자존심은 처음부터 버렸다. 이태원 용산 강남 등지 외국인이 집단 거주하는 지역을 샅샅이 훑고 다녔다. 고급빌라 경비원에게 무수하게 절했다.
"운이 좋아서인지 철저히 준비해서인지 1999년 첫해에 손익분기점을 넘어섰습니다. 자신감이 붙더라고요." 고객이 점점 늘었다. 미국인 영국인 이태리인... 직원도 늘었다. 6명의 직원들은 외국에서 유학하는 등 대화가 자유로운 고급인력이다.
김 사장은 외국어를 못한다. 영어회화를 배우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포기했다. "처음엔 외국어를 못하는 제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내가 외국어를 못하나 외국인이 한국어를 못하나 마찬가지라는 배짱이 생겼습니다."
은행원 출신이라 부동산 권리분석에는 그를 따라올 사람이 없다. 말은 제대로 못해도 우직해보이고 친절한 그를 외국인들은 신뢰했다. 평균 임대 건수가 100여건. 고객들은 월 임대료가 200만원부터 1천500만원 하는 고급빌라나 고급주택을 선호한다. 임대료가 고액이다보니 컨설팅 수입도 제법 짭짤하다. 50-60개로 늘어난 동종업계에서 다섯 손가락안에 든다. 그간 아파트를 사고 장남을 호주 시드니에 유학 보냈다.
짧은 머리에 무스를 바른 옛모습 그대로인 김 사장은 예전에 모셨던 허홍 전 대동은행장을 종종 찾아뵙고 소주를 마신다. 퇴출 은행 직원에서 자영업자로 성공한 김 사장이지만 구 대동은행 사옥을 보면 웬지 마음이 아려온다고 한다. 동료의 얼굴과 함께 망한 대구·경북 기업인의 고통이 떠올라서 일 게다.
최재왕 서울정치팀장 jwcho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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