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니께서는 직장 생활을 하는 막내며느리를 위해 아이들을 맡아 건사하셨다. 4년 터울의 두 남매를 기르시면서 어려운 시절을 살아온 노인답게 모든 점에서 검소하고 알뜰하게 집안 살림을 꾸려 나가셨다. 사소한 물건 하나도 함부로 버리는 일이 없으셨다. 그 무엇보다도 당신께서는 훌륭한 재단사였다. 큰 손자가 즐겨 입던 노란 남방의 소매와 칼라가 다 닳아 헤어지자, 칼라를 떼어 내고 소매 일부를 잘라낸 후, 차이나 칼라, 7부 소매의 셔츠로 만들어 작은 아이에게 입힌 일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보는 사람마다 그 독특한 셔츠를 신기하게 여겼지만, 사연을 듣고는 헌 옷을 활용하시는 할머니의 지혜와 단순하면서도 실용적인 디자인에 모두가 감탄했다. 딸아이는 오빠의 옷을 줄여서 만든 이상한 스타일의 그 노란 셔츠를 무척 좋아했다.
오래된 낡은 옷들을 재활용한 유행 스타일로 그런지 룩(grunge look)과 빈티지 룩(vintage look)을 들 수 있다. 벼룩시장에서 값싸게 구할 수 있는 옛날 옷, 자투리 천 등을 활용한 그런지 룩은 1960년대에 시작되어 히피 스타일과 펑크스타일 등과 맥을 이어갔다. 편안함과 자유스러움을 추구하는 현대인의 욕구와 날로 심각해지는 환경문제의 대두로 1990년대에 들어와서 그런지 룩은 하이패션으로 다시 각광받게 되었다. 빈티지 룩은 말 그대로 오래되어 충분히 숙성된 포도주처럼 고급스러우면서도 편안한 스타일을 말한다.
중고품을 파는 상점에서 발견할 수 있는 세공이 아주 섬세한 브로치, 오래 전 할머니, 어머니들이 멋진 외출을 위해 차려 입었을 실크 블라우스, 그 위에 둘렀던 머플러와 같이 세월이 흘러도 그 품격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그런 의상들은 빈티지 룩을 완성하는데 더없이 좋은 소재가 될 수 있다. 쓸모 있음과 없음, 귀함과 보잘것없음은 물건 자체보다는 그 물건을 사용하는 사람의 자세에 의해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버릴 물건도 귀하게 여겨 먼지를 털고 다듬으면 오래된 세월의 향기가 보태져서 더욱 귀하게 여겨질 수 있는 것이다. 오래된 삶의 지혜와 철학도 이와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한다.
남매를 잘 길러주신 시어머니께서는 이제 아흔이 넘었고 병석에 누워계신다. 격동의 세월을 힘겹게 살아오면서 자식과 손자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다 소진하시고 이렇게 조용히 사그라져 가는 모습은 슬픔보다는 오히려 엄숙하고 경건한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모든 헌 옷을 재활용하여 정성과 사랑으로 마음의 옷을 지어주시던 그 진지한 삶의 자세는 세월이 흘러가도 항상 가슴 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추태귀 상주대 의상디자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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