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디지털 노마디즘과 한글

우리나라는 전 세계에서 가장 짧은 시간 내에서 눈부신 경제적 발전과 민주화를 이루어낸 국가로 알려져 있다. 세계는 우리의 이력과 오늘의 한국을 경이적인 눈으로 바라보고 부러워한다.

뿐만 아니라, 그 기적과도 같은 성장의 비책을 연구하고 배우려 한다. 부존자원도 풍족하지 않고 또 기술 축적의 기반도 잘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어떻게 그렇게 짧은 시간 내에 민주제도의 정착과 경제적 부강을 이루어 낼 수 있었는가? 뛰어난 국가 지도자의 힘이었을까? 아니면 국민들의 저력이었을까? 어느 것 하나도 틀린 것은 아니나, 완전한 정답도 아니다.

현재 우리나라는 지구상 어느 나라도 따라잡기 힘들 정도의 정보화 기술력과 고급 콘텐츠 기반 그리고 뛰어난 문화 기획을 통한 문화연출을 선도할 수 있는 역동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이 거대한 정보문화의 힘의 원천은 바로 한글이라는 위대한 문자의 힘은 아닐까?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의 애민정신이 민주화의 열기에 부응하여 맘껏 국민의 뜻을 펴게 된 것이 오늘의 민주주의의 저력이 아닐까 한다. 80년대에서 90년대로 이어져 온 대학의 민주화 운동을 주도한 핵심은 바로 한글이라는 정보매체로 전달된 신문과 저널 그리고 대학교의 대자보였던 것이다.

실용적 편리성을 추구한 세종대왕의 정보화 예견력은 바로 2000년대의 한글 정보화시대를 겨냥한 것이었다. 2000년대로 들어서면서 정보화의 기술 집적화가 전 세계의 선도 역할을 했는데 그 정보화 기술만이 아니라 정보화의 내용인 콘텐츠 구축도 전 세계를 선도할 만큼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양질의 정보를 세계에서 최고 빠른 속도로 구축하는 일이 가능했던 것은 바로 세계의 문자 중 가장 합리적이고, 과학적이며, 디지털 기술로 조합하기에 가장 적합한 한글이라는 우리의 문자 덕분이었다.

최근 손전화의 기술이 전 세계에서 가장 앞선 나라이며, 손전화의 자판기를 활용하여 가장 빠른 속도로 개인 정보를 교류할 수 있는 나라로 우리가 꼽히고 있다. 손전화의 한글자판은 한글의 자음과 모음의 가획원리에 기초한 것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560년 전 세종이 창제한 한글이 조선시대에는 한문 문화에 짓눌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어에 짓밟히면서 500년을 연면하다가 이제 겨우 한글이 제대로 대접받는 시대가 되었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우리는 전 세계인들과 만나며 온갖 정보와 지식을 쉽게 공유할 수 있는 나라이다. 정보화 덕택에 우리 국민들은 지적 수준의 편차가 없는 거의 없는 세상을 살고 있다. 이처럼 인터넷을 통해 세계인들과 교류하고 지식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저력은 바로 한글의 과학성에서 나온다.

오늘날의 이러한 문명적인 상황을 우리는 디지털 노마디즘이라고 한다.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가 소통하고, 양질의 정보력이 자본주의 시장을 압도할 것이라는 질 들뢰즈의 예견이 현실이 되었다. 이러한 때 온라인을 통한 소통의 새로운 가치체계를 정립해야 한다.

지난날 말을 타고 전 세계를 지배했던 민족의 언어를 유목민형 언어라 정의했는데 이젠 말이 아닌 인터넷 언어를 통해 이질의 민족과 국가를 소통하는 시대에 이른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우리나라는 마치 13세기 몽골과 같은 21세기의 디지털 유목 강국인 셈이다.

그 저력의 밑바탕에는 바로 우수한 한글의 과학성과 합리성이 있었다. 한글이 이젠 한국 사람만의 문자가 아니라 세계인의 문자로 활용될 수 있도록 세계에 알릴 차례이다.

국립국어원에서는 몽골과 중앙시아·러시아 등 재외동포들이 많이 살고 있는 지역에 연차적으로 100여 개의 한국문화학교를 설립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우리 한글을 첨병으로 한 상호문화교류를 활발하게 전개해 우리 한국을 중심으로 한 21세기 동북아지역 문화공동체를 묶어내고 새로운 우방 관계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한류열풍이 한창이 지금이야말로 아시아의 내면적 소통을 위한 수단으로 우리말과 상대국가의 말이 소통되도록 하려는 국가적인 노력을 시작해야 할 적절한 시기이다.

이상규(국립국어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