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계산 논단] 겨울은 봄을 잉태한다

동서고금에 명멸했던 문명권을 21개로 분석했던 토인비는 그 문명권이 서쪽으로 이동해간다는 문명서천설(文明西遷說)을 주장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이 이집트 문명권으로 서천했고 다시 희랍과 로마·유럽·영국·미국 쪽으로 서진(西進)하여 이동했던 것이다.

지금은 미국문명권이 동양으로 서천하며 환태평양(環太平洋) 문명권 시대로 옮겨가고 있는 과도기적 단계이다. 미국의 서쪽은 한국·중국·일본이 주축이 된 동양문화권이다. 오랜 잠에서 깬 중국은 세계를 주도하고 있고,

일본은 일류 경제대국이다.

한국은 지정학적 요충지로서 열강국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어 홍역을 치러왔다. 이런 역사의 흐름이다보니 한반도의 근대사는 격동의 연속이었다. 마치 훌륭한 자식을 낳기 위한 산고와 같은 고통을 겪어온 것이다. 그렇다면 환태평양시대에 있어서 한반도의 세계관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그 해답은 이미 청나라 외교관 황준헌(黃遵憲)이 그의 저서 '조선책략'(朝鮮策略)에서 제시하고 있다. '중국과 친하게 지내고(親中國), 일본과 맺고(結日本), 미국과 이어라(聯美國).' 이런 이론적 배경을 바탕으로 구한말 김홍집·김윤식 등은 자주채서(自主採西·우리 것은 지키면서 서구의 것은 가려서 받아들임)의 정치사상을 정립했던 것이다.

'조선책략'의 '친중(親中)·결일(結日)·연미(聯美)'는 줏대 없이 주변 국가들과 막 어울리라는 말이 결코 아니다. 그들과 반목하지 않고 화합함으로써 오히려 국력을 신장시켜 자주적 부강국을 이룩할 수 있다는 의미인 것이다.

역학에 달통했던 탄허 스님은 한반도의 지세가 풍수지리학적으로 기생의 형국이라고 했다. 아름다운 기생이 남성들과 교류하되 지조를 지키면 뭇 남성들(주변강대국)을 지배하여 세계중심국가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를 되돌아보자. 무작정 일본을 싫어하고, 필요 이상으로 중국을 경계하며, 대책 없이 미국을 대하고 있다. 반(反)조선책략적인 것이 마치 구한말의 국제적 위기상황과 흡사하다.

'조선책략'의 마지막 구절에 '연작처당(燕雀處堂)'이란 말이 가슴을 쓸어내리게 한다.그것은 '집에 불이 난 줄도 모르고 제비와 참새가 처마 밑에서 즐겁게 놀고 있다'는 뜻이다. 당시 주변국이 모두 조선을 위태롭다고 여기는데 유독 조선만은 위기상황을 인식하지 못함을 한탄했던 것이다.

당시의 상황과 120여 년이 지난 작금의 한반도 국제정세 및 분열된 국내 현실이 크게 다르지 않음을 오늘날 우리는 뼈저리게 인식해야 한다. '연작처당'의 경고를 무시하고 간과하며 분열되었던 조선은 결국 1910년 한일합방으로 나라를 빼앗기고 말았지 않았던가.

북한핵문제,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FTA협상, PSI, 6자회담, 대북금융제재 등의 문제는 마치 서슬 퍼런 작두날 위에서 춤을 추는 맨발과도 같은데 우리는 자주국방과 협력국방의 개념에조차 접근하지 못하고 분열되어 있다.

최근 미국은 북한이 핵을 포기하면 6·25전쟁 종전을 선언하겠다고 발표했다. 이것은 정전협정에서 평화협정으로 전환하겠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우리 국민들의 대(對)미국관은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줄리아 스웨이그 미외교협회(CFR) 이사는 "한국 사회는 미국에 대해 반미(反美)·찬미(贊美)·숭미(崇美)·혐미(嫌美)·연미(連美)·용미(用美)·항미(抗美)·폄미(貶美)의 8가지 인식이 공존한다"고 분석하고 있다.

우리는 극단적 숭미(崇美)·친미(親美)나 탈미(脫美)·반미(反美)를 경계해야 한다. 미국과의 끈을 놓지 않는 연미(聯美)의 지혜를 모아 상호 이익되는 동반자적 관계를 유지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또 다시 집을 다 태워버리고 말 것인지, 환태평양시대의 세계 중심국가가 될 것인지 기로에 선 우리 자신을 냉정히 되돌아보자.

어차피 역사도, 문명도 윤회(輪廻)하는 것이다. 파사현정(破邪顯正·사된 것을 깨서 바른 것을 드러냄)이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오늘날 실천한다면 우리는 통일국가의 번영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가을은 아름답고 결실이 있다. 그 가을의 끝자락은 겨울의 길목으로 이어져 을씨년스럽지만 결국 따뜻한 봄을 잉태하고 만다.

지거 스님(조계종 보현의 집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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