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외·친손자 4명 돌보는 배말순 할머니

"끼니 걱정만이라도 안할 수 있었으면…"

"올해도 우리 손주들에게 따뜻한 밥 한끼 못 챙겨줬네요. 일어설 수만 있으면 일이라도 나갈 텐데..."

배말순(80) 할머니는 손자들에게 그저 미안할 뿐이다. 한창 먹성 좋을 나이의 손자들을 배불리 먹여본 적이 없어서다. 할머니는 다리를 쓰지 못해 일을 할 수 없다. 5년 전 넘어진 다리를 제대로 치료하지 못해 장애가 생겼다. 게다가 천식에 고혈압까지 있어 아이들을 제대로 챙겨줄 수도 없다. 그래서인지 할머니는 "유독 이맘때가 되면 아이들에게 더욱 미안해진다"고 했다. 크리스마스와 연말에 가족과 외식하러 나가는 친구들을 보고 기죽어 들어 오는 손자들 볼 낯이 없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10년째 혼자 힘으로 손자들을 키우고 있다. 외손자 3명을 남겨두고 말없이 사라진 딸을 대신해서다. 이미 키우던 친손자까지 모두 4명의 손자를 직접 키웠다. 할머니에게 이들 손자는 '존재의 이유'다. 천식 때문에 온종일 마른 기침을 뱉고 다리를 못써 기어다니며 살고 있지만 할머니는 "아이들을 위해 절대 삶의 끈을 놓을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은 마음이 '천 갈래 만 갈래'다. 손자들을 돌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손자들의 보호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특히 셋째 손녀 미진(11·여·가명) 이의 손만 보면 눈물이 절로 난다고 했다. 미진이 손은 초교생 같지 않게 습진으로 빨갛게 벗겨져 여린 속살이 드러나 있다. 할머니를 대신에 차가운 물에 손을 담그며 집안 일을 도맡다 보니 생긴 상처다. 할머니 집은 난방조차 되지 않는다. 기름도 없고 고장 난 보일러를 고쳐줄 사람도 없어서다. 다섯 명이 한 방에 누울 때만 따뜻해진다고 했다.

아이들은 크리스마스에도 라면으로 끼니를 때웠다. 냉장고엔 복지관에서 받은 김치가 전부다. 할머니는 못 먹여서 그런지 막내 손자 은진(6·여·가명)이가 말라간다고 걱정이다. 둘째인 영환(19·가명)이도 안쓰럽긴 마찬가지다. 영환이는 요즘 할머니를 위해 일을 나가고 있다. 7년 전 할머니가 자궁암으로 쓰러졌을 때 영환이는 할머니 병 간호를 위해 중학교를 그만둬야 했다. 할머니는 "영환이가 새벽에 일을 나갈 때마다 밥을 챙겨줄 수 없어 미안하다."고 했다. 하지만 영환이는 하루 만 원도 벌지 못할 때가 많다. 공사판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할 수 없이 할머니는 정부에서 주는 식권으로 손자들과 함께 끼니를 해결하고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첫째 손자인 진영(20·가명) 이가 동생들 학용품을 살 돈이나마 마련해 주는 것이다. 진영이는 일하러 나갔다가 며칠 만에 돌아와 동생들에게 용돈을 주고 가곤 한다. 하지만 이젠 이런 진영이마저도 할머니 곁을 떠나게 됐다. 군대에서 입영 영장이 나온 것. 할머니는 "군대에서는 따뜻한 밥이라도 주니까 오히려 잘 된 것이라고 생각하려 해도 자꾸 눈물이 난다."고 했다.

"우리 착한 아이들 배 곯리지 않고 키워야 할 텐데....할미가 죄인이네요."

정현미기자 bor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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